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연필 깎기의 정석데이비드 리스 지음, 정은주 옮김/프로파간다(2013)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오, 딱 내 스타일이야. 인간의 공작 본능(호모 파베르)에다가 숨어있는 문구 성애까지 자극하는 책의 유혹에 바로 넘어가고 말았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장인의 혼이 담긴 연필 깎기의 이론과 실제’라는 부제목이나 ‘최고의 에이치비(HB) 연필 깎기 장인’이라는 저자 소개, 게다가 ‘문필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목수, 기술자, 공무원, 교사를 위한 책’이라는 카피까지 나 같은 독자를 꼬드기기에 충분했다. 나야말로 목수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 연필 깎기라도 잘해볼까봐.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죠리퐁’ 개수 세기나 감기약 ‘콘택600’ 입자 세기에 도전하여 수십 번의 통계로 적정개수와 표준편차를 구하고 득의양양해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상품개발자에 이입해 라면봉지 뒷면에 왜 하필 4분 35초를 끓이라고 되어 있는지에 주목하여 1초도 넘치지 않게 끓여내는 사람들도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이런 몰입의 경험이 삶의 행복감과 창조성을 북돋운다고 찬양한 바 있지만, 이런 분석만으로는 뭔가 아쉽다. 이런 시시한 짓들은 왜 우리를 유혹하는가? 우리는 왜 연필 깎기에 빠지는가? 이 책의 재미는 우선 천연덕스러움에 있다. 책의 맨 앞장에는 ‘고객의 증언’이라는 독자 반응이 실려 있는데, 연필 깎기에서 겪은 고통과 환희의 경험을 “기절초풍” “완벽” “혼을 다 바쳐” “삶의 희망”이라는 표현으로 고백하는데, 킬킬거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손 안의 도구와 나의 하나됨의 경험은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양태라고 하이데거도 말한 바 있다. 그것을 실행하기라도 하듯이 이 책은 준비단계를 비롯해 에이치비(HB,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경도) 연필의 특성, 연필깎이 도구들의 장단점, 각종 깎기 스킬, 샤프펜슬에 대한 비판, 연필 깎기와 정신건강의 관계까지 우리 존재를 연필화(pencilization)하고 있다. 부록에 ‘연필 맛 와인’(와인에는 실제 그런 맛이 있다)과 ‘연필 애호가들이 순례해야 할 성지’까지 수록한 데는 두 손을 들게 된다. 철학에는 기술철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기술이나 도구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탐구하는 일종의 문화철학인데, 현대 기술철학의 상당 부분은 하이데거에 빚지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끊임없이 미래를 계획함으로써 현재를 만들어가는 기투의 존재라고 하면서 그 필수요소로 도구를 든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도구를 통해서, 도구가 없으면 손이라도 써서 이루어지는데, 뭔가의 실행에 빠져있는 동안 도구는 어느덧 사라지고 세계에 대한 맥락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글자를 한자 한자 쓰는 동안 연필의 존재는 어느덧 사라지지만, 연필은 그 행위 속에서 비로소 필기구라는 의미를 얻고 종이와 함께 글자를 만듦으로써 인간과 함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로서의 지위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를 ‘손 앞에 놓인 대상’(Vorhandenes)과 구별하여 ‘손안에 쥐어진 것’(Zuhandenes)이라고 부른다. 책에서 말하는 “연필에 투사된 영혼”은 그저 웃으라고 하는 과장만은 아니다. 우리는 연필 깎기를 통해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 그리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를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표지는 노란색이다. 연필 색깔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노랑인데 이 색이 사람들에게 심신의 평안을 주기 때문이라는 연구도 있다. 꼼꼼해서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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