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12 19:59
수정 : 2017.10.12 20:41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궁리(2013)
인문사회과학서는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늘에 사는 이들의 삶을 다루곤 한다. 왕정과 국가 중심에서 벗어나 잿빛 공간의 사람들에게 학문이 목소리를 내어준 지는 꽤 오래됐다. 그래서 책 보는 게 곧 업무인 편집자는 불평등이나 소외 같은 이슈를 늘 접해 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지만, 아늑한 집에 돌아오면 그 문제의식과의 괴리 때문에 괴로움의 ‘감정’은 커져만 간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를 보니 감정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일단 방향을 잘 잡은 듯싶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모두 ‘소설’을 읽어야 한다. 타인의 삶을 세밀하게 간취해내는 데 문학만 한 것이 없고, ‘공감’은 ‘이성’만큼 중요하니 정부 관료든 누구든 일단 소설을 봐야 한다고.
왜 소설인가. 소설은 하잘것없는 것에 관심을 가져 생의 감각을 형성하는데, 특히 비유의 언어로써 독자가 부드러운 ‘공상’을 하도록 재촉한다. 공상은 인간 삶을 ‘쓸모 있음’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실 너머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는 흙탕물 속에 뒹굴며 울부짖는 등장인물을 관찰하면서 사유의 불편한 패러다임을 확보하고, 그들이 지금은 자갈길을 걸어도 언젠가 그곳에 정원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면 누가 소설을 읽어야 할까. 경제학 및 법학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논파해온 누스바움은 특히 경제학자와 법관들이 소설을 읽을 것을 권한다. 근대 공리주의 경제학은 인간을 ‘만족시켜주면 되는 엔(N) 분의 1의 존재’로만 간주해 개별 인간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또한 법은 오로지 ‘이성’의 영역으로 여겨져 판결을 내릴 땐 감정을 배제할 것을 주문해왔다. 하지만 ‘몫 없는 자들’에게 몫을 되돌려주는 게 법이라면 법관들은 억압받는 집단에 대한 동일시와 사색이 있어야 하고, 실천적 추론을 이뤄내려면 법이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의 영역임을 깨우쳐야 한다고 누스바움은 강조한다. 법은 마치 햇볕처럼 어떤 것도 감추지 않고 모든 사물의 켜와 결을 비춰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사회소설인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을 독해함으로써 법과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소설 속 주인공 그래드그라인드는 자식들 교육에서 공상과 감정을 배제하는 공리주의자다. 그에게 노동계급은 가령 “수요공급의 법칙에 의해 정의되며, 여기에 걸려서 머뭇거리다가 곤란에 빠지는 존재, 밀이 비쌀 때는 약간 쪼들리다가 쌀 때는 과식하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구제불능인 것은 아닌데, 타인에게 어떤 공감이나 헌신도 못 느끼는 또다른 등장인물 비처의 괴물성에 비해서는 ‘좋음’으로 나아갈 자질을 지녔기 때문이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마침내 그를 좋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공상과 공감으로써 우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가령 그런 감정 중 ‘연민’을 떠올려보자. 연민은 타인이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적 공상은 곧바로 정부의 정책을 바꾸진 못한다 해도 정치경제와 법에서 연민을 배제하지 않음으로써 변화의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다. 누스바움이 말하듯,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와 동떨어진 이들의 삶에 개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할 것이고, 그와 관련된 감정을 갖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 이번주부터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이 집필합니다. 4주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을 소개하며, 그중 한 권은 자사 책을 씁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