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4 19:08
수정 : 2018.01.04 19:14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전면개정판)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창비(2017)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사나흘 정도 여행을 다녀왔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양양 터미널에서 만나 설악산을 오르고 오래도록 함께 얘기하며 동해 바닷길도 걸었다. 으레 송년회 술자리에 나가 두어 시간 여러 사람과 시간을 보내기보다 요 몇 해 이렇게 연말을 보내니 이게 더 좋다.
“사람은 부모보다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 2018년 또 한 해도 우리는 시대를 닮아갈 테고, 우리의 아이들은 새로 펼쳐질 한국현대사 속으로 더 조금씩 스며들 것이다. 사회학자 베링턴 무어가 한 이 말처럼,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은 적어도 이 땅의 수많은 청년을 시대와 역사 속에 묶어 놓았다.
책도 시대를 닮는 것일까. 지난해에 나온 책 가운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창비)은 출간 열흘도 안 돼 산 책이 5쇄였던 걸 보면 꽤 많이 팔린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서 어른이 된 유가족을 와락 껴안았고, 영화 〈택시 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 황석영이 텔레비전에 나와 시청자를 울리고, 광주학살에 관한 군의 공식 기록 은폐와 당시 공군의 움직임 등이 보도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겐 놀랍지 않은 ‘새로운’ 사실일 터이고, 발포 책임자나 미국의 책임, 희생자 수 같은 광주항쟁 진상 규명은 “다스는 누구 겁니까?”와도 같은 물음일 뿐이리라.
이 책은 이런저런 르포와 결이 다르고 개인의 수기나 회고록, 비망록처럼 기억을 재구성한 이야기도 아니다. 고딕체로 찍혀 있는 부제목 그대로 ‘기록’이고, 긴박한 현장의 상황과 당시의 사건 흐름이 오롯이 담겨 있는 집단 오디세이다. 그 어떤 사상이나 이론보다 급진적인 ‘진실’의 힘, 거기에서 나오는 후폭풍과 공감각적인 여진은 영화나 소설에 비길 바가 못 된다. 이번 전면개정판이 사실상 ‘완결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초판(1985, 풀빛) 첫머리에 실린 문병란의 시 〈부활의 노래〉와 진혼가에 가까운 〈발간사〉가 통째로 빠진 것은 아쉽다.
편집자로서 보기에, 우선 이 책은 ‘전면개정판’에 걸맞은 말끔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30여 년 전에 나온 초판에 견주어 두께는 곱절이나 되고, 전에는 없던 주석과 참고자료, 날짜별 경위, 생생한 사진이 실려 있다. 초판에서 밝히지 못한 구체적 사실과 계엄군 부대 지휘관?시민들의 실명을 꼼꼼한 확인해 밝혀 놓았고 사진은 꼭 필요한 것만 선정하느라 고민한 흔적도 보인다. 초판을 읽은 분도 꼭 다시 사보길 권한다. 사실 초판에 실린 스무 장 가까운 지도만도 당시 사건 장소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인상적인 편집이긴 했다.
대학에 들어가던 해 대구교대 앞 소극장에서 광주 극단 토박이의 공연 〈금희의 오월〉을 본 뒤 집에 돌아와 이 책을 처음 읽었는데, 당시에 분노보다 공포감이 더 컸고 오래도록 짓눌렸다. 나는 이듬해 겨울 20사단 60여단에 입대했고 광주에서 ‘진압군’이 쓴 무거운 방탄유리 방석모를 쓰고 맞아가며 ‘충정훈련’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사실 몇 해 전까지도 뉴스에 갑자기 전두환이나 장세동이 등장하면 무서웠다.
오월 광주, 아니 죽음을 넘어 빛나는 시대를 열고자 나주, 화순, 영암, 해남, 함평, 무안, 강진, 남도 전역에서 항쟁을 펼친 이들의 마음 밑바탕에는 공포나 분노가 아니라 단단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음을 새삼 느꼈다.
송병섭 삼천리 대표
※ 이번주부터 송병섭 삼천리 대표가 집필합니다. 4주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을 소개하며, 그중 한 권은 자사 책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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