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
박흥수 지음/후마니타스(2017)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역까지 9288㎞. 아시아와 유럽을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 노선. 경부선의 21배 길이. 여행자들에게는 언젠가 꼭 한번 타보고 싶은 로망. 중간에 내리지 않고 달려도 6박7일이 걸린다는 광활한 대륙. 근현대사를 관통해 열차가 실어 날랐던 수많은 사연과, 일제강점기 한인들의 꿈과 눈물이 뿌려진 시베리아라는 공간이 우리로 하여금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을 꿈꾸게 한다. “나의 부친은 하바롭스크 시에 묻혀 있다. 어머니는 크림 주 옘파트라 시에, 외할아버지는 타슈켄트 주 미르자 촌에, 친할아버지는 연해주 수하놉카 촌에, 외할머니는 타슈켄트 주 사마르스코예 촌에, 그리고 친할머니는 카자흐스탄의 침켄트 시에, 형님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촌에 안치돼 있다. 그러니 이 고인들을 누가 모셔서 성묘할 것인가.” 본문에서 재인용된, 한인 혁명가 김 아파나시의 아들 김 텔미르의 증언은 무덤조차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가슴 아픈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길은 최재형과 홍범도가 달린 철길이었고, 젊은 마라토너 손기정이 몸을 실은 열차였다. 박헌영?주세죽 부부가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향했으며, 안중근, 이광수, 조봉암, 여운형,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해야 했던 수많은 한인들이 이 열차를 탔다. 22년간 기차를 운전해 온 현직 기관사이자 역사 ‘덕후’인 저자는 우리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우고 과거와 현재를 가로질러 곳곳에 내려놓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그의 열차는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예카테린부르크를 지나 모스크바,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베를린에 닿는다. 그 길을 따라 역사 속에 묻히고 잊힌 한인들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동쪽 기착지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일제강점기 한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신한촌이 있었다. 1911년 개척리에서 쫓겨난 한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하기 전까지 일군 마을이다. 러시아 말을 못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한인들로 북적였던 이곳은,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연해주로 건너간 수많은 혁명가들의 베이스캠프였으며, 조선인 학교가 있었고 조선어 신문도 발행되었다. 1920년 4월5일에는 일본군이 자행한 학살로 수많은 한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고, 1937년 이곳에서도 쫓겨나야 했던 한인들이 짐 보따리를 들고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탔다는 슬픈 역사가 전해진다. 하지만 현재 신한촌에는 그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살았던 자리에는 엘레나 슈퍼마켓이 들어섰고, 1920년에 세웠다는 독립문도 찾을 수 없다. 존재도 기억도 사라진 신한촌. 이렇게 사라질 것을, 그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 하지만 저자가 열차에서 만난 북한 벌목공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아직도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오래전,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했던 젊은 한인들을 시베리아 시간여행에서 만나 보시기를. 정민용 후마니타스 대표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