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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09 19:13 수정 : 2018.08.09 19:44

[책과 생각] 편집자가 고른 스테디셀러

거미 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민음사(2000)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한 감방. 두 남자가 갇혀 있다. 발렌틴은 마르크스주의자로, 아마도 도시 게릴라 활동 중에 체포된 듯하다. 몰리나는 의상실에서 일하는 동성애자로, ‘미성년자를 유혹’한 죄로 들어왔다. 심심한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나 하겠노라고 한다. 하나같이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대신 죽는 내용이다. 몰리나는 그런 걸 좋아한다. 그를 여러모로 깔보는 발렌틴은 마지못해 들어 주기로 한다. 단,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자기가 한두 마디 논평을 가할 수 있다는 조건이다. 그 논평이란 게 얘기하는 사람의 기분을 딱 잡치게 만드는 그런 유이긴 하지만. 발렌틴이 모르는 것은, 교도소장에게 포섭된 몰리나가 스파이로 여기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거미 여인의 키스>는 1976년 스페인에서 출간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판매 금지가 풀린 것은 민주정이 회복된 1983년이었다. 1983년 작가 자신의 각색으로 연극 무대에 올랐다. 1985년에 영화가 나왔다. 몰리나 역의 윌리엄 허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93년에는 뮤지컬화되었다. 한국에 이 소설이 알려진 것은 영화 덕분이다. 극장 개봉은 되지 않았지만 대학가에서 틀곤 하였다. 대학에서 틀기 좋은 영화였다. 황지우와 유하는 시를 한 편씩 남겼다. 1991년에 가람기획, 1995년에 현대미학사에서 번역판이 나왔는데 반응이 신통치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고부터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시사점이 있다.

출간 당시 이 책이 가졌을 법한 신선함을 지금 상상하기는 좀 어렵다. 이제 영화를 내세우는 소설 작법은 전복적이라기보다는 고전적으로 보인다. 해결되지 않은 여러 어려움들은 여전하지만, 동성애자들은 더이상 신기한 소품처럼 등장하지는 않게 됐다. 위신이 수직으로 추락해 온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몰리나와 발렌틴의 간격이 얼마나 커 보이든, 그들이 모종의 신뢰 관계를 수립하는 일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건 교도소장이 애초에 기대한 바였기 때문이다. 소장이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손에 쥔 정보를 몰리나가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는 당돌한 사태였다. 몰리나는 가석방되고, 발렌틴의 부탁대로 그의 동료들을 만나러 간다.

이야기는 바야흐로 영화평론가 폴린 케일을 격분시킨(“비밀 접선한다는 인간이, 파란 셔츠에 빨간 스카프를 매고 나가나?”) 장면에 이른다. 영화가 그렇지 소설에는 없는 디테일인데, 케일은 여기서 윌리엄 허트의 복장보다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센티멘털하게 만드는 기획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그녀의 요점은 ‘몰리나가 발렌틴과의 만남으로 자기 자신까지 버리는 경지에 이른다는 구원의 드라마는 (…) 그가 몰두하는 40년대 로맨스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가짜’라는 것이다.

이런 차가운 판단은 원작의 기조와 부합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소설을 읽으면 몰리나는 끝까지 몰리나였음을 알 수 있다. 발렌틴도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냐 하면 둘의 ‘경계가 흐려지고’ ‘서로 위치를 바꾸’는 전개 속에서도 ‘여주인공이 되기’와 ‘훌륭한 대의명분’으로 대표되는 각자의 환상은 양보 없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푸익은 이런 집착을 나쁘게 보지 않으며, 짓궂게 즐거워하는 듯하다.

두 사람이 있다. 우연히 같은 장소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포획되고, 이용하고, 한 사람이(또는 둘 다) 희생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때는 믿을 수 없지만, 돌이켜보면 자신이 변화하지 않아도 한 바퀴 원을 그리고 완료되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이야기다.

김영준 열린책들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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