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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08 19:46 수정 : 2017.03.08 19:50

권용득

[ESC] 권용득의 살림

권용득
아들 권쥐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지난 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입학식 전날 새로 산 책가방을 끌어안고 잠든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말이다. 심지어 지금은 등굣길에 있는 한의원부터는 자기 혼자 가겠다며 따라오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아쉽다. 녀석이 자기 속도가 아니라 세상의 속도에 맞춰 쑥쑥 크는 것만 같아서. 그런데 나도 그랬을까. 아침마다 권쥐를 한의원까지 바래다주면서 내 어린 시절이 어렴풋이 겹친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입학식 때 내 가슴에 커다란 손수건을 꿰매주셨다. 옛날에는 다들 그랬다는데, 가슴에 손수건을 꿰맨 아이는 전교에 나밖에 없었다. 최신 아동패션에 무관심한 편이었지만,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처음으로 어머니한테 대들었던 것 같다. 가슴에 손수건 좀 제발 떼 달라고.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니가 콧물을 흘리지 말든가.” ‘아, 인생이 이런 거구나.’ 그 무렵부터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가슴에 우스꽝스러운 손수건을 떼고 싶다면 먼저 콧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는 알게 됐다는 얘기다. 그 뒤로 나는 콧물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물론 요즘에는 가슴에 손수건을 꿰맨 아이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이 콧물을 안 흘리는 건 아니다. 팔소매의 깨끗한 쪽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콧물을 닦아내는 꼼꼼한 아이도 있고, 친구 옷에 콧물을 몰래 묻히는 꼬롬한(치사하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아이도 있고, 흐르는 콧물을 그대로 방치하는 대범한 아이도 있다. 저마다 요령껏 콧물을 삼키고 닦아내는데, 3학년쯤 되면 대개 더는 콧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 대신 학교를 왜 꼭 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적어도 권쥐는 그랬다. 권쥐뿐만 아니라 권쥐 주변에 ‘학교가 재밌다’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왜 학교가 재미없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지루하다고 대답했고, 이놈의 학교는 33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싶었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많이 배워서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가슴에 손수건을 꿰맨 아이는 찾아볼 수 없어도 학원을 몇 개씩 다니는 아이는 너무 많으니까.

“학원에서 다 배운 거예요”라는 대답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그런데 학원 문턱도 가본 적 없는 권쥐는 왜 학교가 재미없다고 하는 걸까. 학원에서 다 배운 주변 친구들의 영향 때문은 아닐까. 문득 내 아이만 행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가 행복하려면 주변 친구들도 같이 행복해야 하는 건 아닐까. 말하자면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와의 경쟁에서 어떻게든 이기길 바라는 부모들은, 정작 자기 아이의 행복을 빼앗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번은 권쥐가 수수께끼를 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물질 중 하나인 칼리포르늄은 1그램에 310억원 하는데, 이게 10그램 있으면 얼마일까요? 즐겨 보던 만화책에 암치료제로도 쓰이는 칼리포르늄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3100억원이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권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맞힐 수 있냐며 나를 마치 인공지능 컴퓨터라도 되는 것처럼 신기한 눈빛으로 우러러봤다. 권쥐는 답을 계산할 때 310억을 성실히 열 번 더했던 것이었다. 칼리포르늄은 알면서 10단위의 곱셈은 몰랐던 것이었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권쥐에게 10단위 곱셈법을 가르쳐줬다. 어떤 수에 10이나 100을 곱할 때는 일일이 더하지 말고, 어떤 수 뒤에 0의 개수를 더해서 읽으면 된다고 설명해줬다. 권쥐는 제법 잘 알아들었고, 내가 예로 든 문제의 정답을 모두 맞혔다. 나는 마지막으로 곱셈의 앞뒤를 바꾼 응용문제를 하나 더 냈다. “그럼 10 곱하기 15는 얼마일까요?” 권쥐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다 짜증을 내며 말했다. “갑자기 그렇게 어려운 걸 내면 어떡해!”

아직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았고, 구구단도 겨우 외우는 녀석에게 괜한 걸 가르쳐줬나 싶었다. 무엇보다 권쥐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인생은 10이나 100을 곱하는 것처럼 어림잡을 수 없다는 걸. 미련스럽지만 하나씩 천천히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걸 벌써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권용득 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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