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14 14:23
수정 : 2018.11.20 16:00
Weconomy | 김재수의 갑을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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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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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무르세요.”(Stay hungry. Stay foolish)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스티브 잡스의 축사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이 말은 교회 설교, 멘토의 상담, 스타강사들의 스토리텔링에서 수 없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감명을 받고 도전 의식을 불태우려고 할 때, 저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다단계 사기에 속고, 보이스피싱에 속고, 엉터리 후기에 속고 있습니다.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많이 속는 것은 다름 아닌 갑의 감동적인 스토리입니다.
어떤 이가 건강검진에서 특이 질병의 양성 반응을 받았습니다. 생존율이 낮은 무서운 질병입니다. 진단이 얼마나 정확한지 묻자, 의사는 99% 정확도라고 답했습니다. 99% 정확도란 실제로 질병이 있는 100명이 검사를 받으면 99명이 양성반응을 얻고, 반대로 질병이 없는 100명이 검사를 받으면 99명이 음성반응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검사의 정확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은 질병에 걸렸다고 판단하고 실의에 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통계학 기초 개념인 베이즈 정리를 이해하면, 아직 낙담하기 이릅니다. 양성 반응을 얻었다 해도, 정말로 질병에 걸렸을 확률이 현저히 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이 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수는 10만명 중 100명이라고 합시다. 나머지 9만9900명은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99% 정확도를 보이는 검사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질병이 실제로 있는 100명 중에서 99명이 양성 반응 판정을 받습니다. 반면 질병이 없는 9만9900명 중의 1%, 즉 999명도 양성 판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건강검진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이들의 수는 총 99+999=1098명입니다.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정말 질병을 지닌 99명 중 한 명인지, 질병을 지니지 않은 999 중 한 명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양성 진단을 받은 이들 중 진짜 질병을 가질 확률은 얼마입니까. (99/1098)=9.01% 정도에 불과합니다.
왜 많은 사람은 99%의 확률로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합니까. 최초 이 질병이 있을 수 있는 ‘기저확률’이 0.1% 정도로 낮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질병이 없는 이들 중에서 양성 판정을 받는 이들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기저확률을 무시하면 다른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고의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저확률 무시라는 확률적 사고의 실패는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와튼 경영대의 교수이고 <오리지널스>의 저자인 애덤 그랜트는 창조적인 사람들의 특징을 말할 때마다 첫 번째로 ‘게으름’을 꼽습니다. 많은 이들은 “게으른 나도 창조적이겠구나”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해석은 양성 판정을 받은 후,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오류와 똑같습니다. 우리 주변의 게으른 사람들을 둘러 보십시오. 전혀 창조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 아닙니까. 창조적인 사람들은 실제로 극소수라는 사실, 즉 기저확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적인 사람 중 심지어 99%가 게으르다 해도, 창조적인 사람의 비율이 0.1%라면, 게으른 사람이 창조적일 확률은 앞서처럼 9.01%입니다. 따라서 애덤 그랜트 교수의 말을 ‘나는 게으르므로 창조적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하나의 스토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주장, 자신의 경험과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대화와 글들은 이와 비슷한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의 스토리는 마치 양성 진단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스토리의 신빙성이 높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스토리는 통계적 진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스토리에 집중하면 기저확률을 무시하게 됩니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들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흥미롭지 않고 감동적이지 않은 다른 종류의 스토리가 충분히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스토리텔링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스토리는 번뜩이는 영감과 통찰을 주고, 우리의 삶을 보듬어 주고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주목받는 스토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에피소드, 병을 고친 이들의 간증, 부자가 된 이의 비법같은 것들이기 쉽습니다. 시장에서 잘 사고 팔리는 스토리는 스티브 잡스의 격언과 애덤 그랜트의 연구처럼 갑의 스토리입니다. 자기중심성에 갇힌 갑은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갑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진 을은 갑의 설교, 멘토링, 강의를 의심하지 않고 소비합니다. 복잡한 세상의 통계적 진실을 보지 않고 자기 확신이 강한 이들이 서로를 속이고 속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배고픈 채로, 어리석은 채로 머무르세요.” 혁신을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위험을 무릅써야 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스티브 잡스의 조언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 대학 졸업생에게는 꼭 필요한 조언입니다. 이들은 가장 똑똑할 뿐만 아니라 이미 스탠퍼드 졸업장이라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기에, 스티브 잡스의 말에 더 귀기울이면 좋겠습니다. 월스트리트 금융가가 제시하는 단기적 고연봉을 선택하기 보다, 정부, 시민단체, 스타트업 등에서 다양한 사회적, 기술적 혁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은 그의 조언을 의심해야 합니다. 혁신적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이들은 정말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조언을 인용하며 우리를 기만하려는 다른 갑들의 의도를 꿰뚫어 보고 폭로해야 합니다. 이들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 또는 '스티브 잡스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즐겨 말합니다. 좀처럼 사회 구조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개인의 노력과 선택의 몫으로만 국한하려고 듭니다. 우리는 배고프지 않아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어리석지 않은 의사결정과 협력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미국 인디애나 퍼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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