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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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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김공회의 넥수스 레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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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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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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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을 ‘회의’라는 열쇳말로 규정해도 좋을까? 먼저 경제가 발달해오던 방식에 대한 회의가 무엇보다 크다. 최근 ‘세계화’에 역행하는 움직임은 그 결과다. 이른바 ‘선진국들’에서 극우 성향의 자국민 중심주의가 정권을 잡을 정도로까지 성장했다는 것은 지난 10년 사이 가장 두드러진 정치적 ‘사건’ 중 하나일 테다. 이런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경제정책이 반(反)세계화인데, 이는 단순히 구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영국의 브렉시트 찬성 국민투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직후 미국의 자유무역협정 철회 등으로 실현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반성의 기회가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파들이 주장하던 기존의 ‘묻지 마’ 식 세계화 드라이브가 결코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환기해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간 좌파들의 구호였던 ‘세계화 반대’가 진정으로 ‘진보’의 길이냐는 물음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경제학에 대한 회의도 컸다. 200년 넘게 유지되었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부에서, 그것도 현대 경제의 ‘꽃’이라고 할 만한 금융 부문에서의 시스템 붕괴로 지난 10년은 시작되었다.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경제학자들은 대체로 무기력했다. ‘왜 아무도 위기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라는 영국 여왕의 단순한 질문에 쩔쩔매던 경제학자들은 결국 ‘시스템 전체를 보는 시각이 부족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설립 직후부터 줄곧 ‘제3세계’에서 자본주의 체제 확립을 지도했던 국제통화기금(IMF)의 최고 경제학자들도 그동안 나라별 특성들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인 경제모형을 강요한 게 잘못이었다고 반성했다.
지난 10년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는 ‘넥수스 레룸’
이 코너의 제목 ‘넥수스 레룸(nexus rerum)’은 이상의 배경을 떠올리며 붙여 보았다. 라틴어 ‘nexus’는 ‘연결’, ‘유대’라는 뜻이다. 이 연결은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관계’를 일컫기도 한다. 그래서 ‘nexus’에는 ‘노예’라는 뜻도 있다. 고대 로마에선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는 법에 따라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rerum’은 ‘사물’을 뜻하는 ‘res’의 변형으로서, ‘넥수스 레룸’은 그리하여 ‘만물의 연결(유대)’, ‘만물의 상호 뒤얽힘’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세상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 자체는 고대의 철인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성을 갖춘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다. 물론 ‘초연결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만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판에 박힌 ‘일상의 사실’이지만, 그런 연관이 막 형성 중이던 근대엔 오직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중 대표자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고,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며, 도처에서 연계를 맺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의 개발을 통해 모든 나라들의 생산과 소비를 범세계적인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공산당 선언>(1848년)의 한 대목이다.
물론 이러한 통찰을 발휘한 것으로 치면 마르크스가 유일한 것도 아니고 처음도 아니다. “모든 상품들을 다루는 하나의 상설시장이 열리고 그리하여 누구든 자기 집을 떠나지 않고서도 화폐를 매개로 토지, 동물, 인간의 근로에 의해 생산된 모든 것들을 획득하고 즐길 수 있는 하나의 도시로 전 세계가 실제로 변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들 사이의 교류가 전체 지구를 가로질러 퍼졌다. 놀라운 발명이다!” 화폐의 범용성을 상찬하는 이 놀라운 문장들은 무려(!) 17세기 중엽의 이탈리아인 제르미니아노 몬타나리(Germiniano Montanari: 1633~87)가 쓴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공산당 선언>의 구절은 애초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잘 포착해서 주목을 받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화(globalisation)’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만물의 연결’이 지리적인 측면에서만 이뤄진 건 아니다. 마르크스가 실제로 ‘넥수스 레룸’이라는 구절을 써가며 환기하고자 한 근대적 현상은 세상 만물이 하나의 ‘교환가치’, 곧 가격을 갖는 상품의 형태로 서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이 ‘만물의 상품화’ 이면에는 인구의 대다수가 임노동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있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수의 자본가에게 고용된 채 하루 종일 특정한 상품을 생산하고, 여기서 받은 임금으로 남들이 온종일 만든 다양한 상품들을 시장에서 구매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의존, 원래 의미 그대로의 ‘넥수스 레룸’이다.
그러니 ‘넥수스 레룸’이란 근대적 삶의 본질적 조건이라 할 만하고, ‘넥수스 레룸’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것은 인류사회 발전의 도도한 흐름이다. 이 흐름을 자본주의라고 할 수도 있고 세계화, 심지어 신자유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마르크스는 이 과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속박하는 속성이 있음을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이 흐름을 거스르고 과거로 돌아가자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몇몇 정책을 철회하는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미덕’을 흡수하고 음미하는 것이다.
상품을 매개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의존’
한편 이러한 현실의 움직임에 발맞춰, 그리고 그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로서 발달한 학문이 경제학이다. 근대 경제학의 기초를 놓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년)이 분업에 관한 논의로 시작되는 것은 이를 잘 반영한다. 공장 안에서는 물론 공장 바깥의 사회에서, 나아가 세계 전체를 가로질러 형성된 분업망이야말로 근대 세계의 ‘넥수스 레룸’이다. 분업은 근대 경제 특유의 현상이며, 줄잡아 18세기 중엽에 폭발적으로 증대된 생산력의 원천이다. 스미스가 거기 주목한 것은 당연하며,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은 근대의 학문이자 ‘넥수스 레룸’의 학문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처음부터 경제학은 그것이 다루는 대상을 둘러싼 이러저러한 사정들을 두루 ‘존중’했다. 이 점은 <국부론>만 조금 훑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거기엔 노동자와 자본가(그리고 지주)라는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는 집단들의 대립과 갈등이 있고, 민족 간 차이에 대한 고려와 그러한 차이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역사들이 있다. <국부론>만 그런 게 아니다. 계급 갈등은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주된 테마로 발전하였고, 민족적 고유성과 역사라는 주제는 독일 역사학파의 경제학에서 한껏 꽃피웠다. 그뿐인가? 만물들 간의 관계들은 하나의 총체를 이루는데, 이 총체 자체를 다루는 것이 경제학의 주요한 과제였다. 그것은 개체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고유한 존재론적 ‘무게’를 갖는다. 요컨대 경제학은 사회학이자 정치학이며 철학이자 역사학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물이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근대의 현실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보면, 18~19세기의 ‘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그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었던 다양한 학파들에 비해 오늘날의 경제학이 얼마나 편협해졌는지가 드러난다. 경제학사가들이 입 모아 지적하듯 고전파 이후 경제학은 역사·계급·구조·산업 등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들을 떨어내고 ‘순수 경제학(pure economics)’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이 순수 경제학에 적합한 방법론으로 채택된 것이 수학이었는데, 경제학에서 수리적 방법론이 확립되자 거꾸로 그 방법론으로써 적절히 다뤄지기 어려운 것들이 경제학의 영역에서 쫓겨나는 ‘주객전도’까지 벌어졌다.
현실을 솔직하게 반영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안내하는 도구로써 경제학
2007~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그 이전에 ‘제3세계’에서 빈곤축소와 ‘세계화’ 프로젝트 실패 등은 경제학의 편협함과 왜곡된 발전상을 반영한다. 경제학자들은 현실의 실패 앞에서 ‘그것은 경제학의 실패가 아니라 잘못된 정책의 실패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습관이 있다. 이것은 뻔뻔스러운 변명이기만 한 게 아니다. 반대로 이 말이 타당해도 문제다. 그것은 자신들은 ‘실제 현실’에는 관심이 없다고 경제학자들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론이 현실을 100%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이론이 좋은 이론이다. 그런 노력은 현실의 경제를 자신만의 편협한 잣대로 재단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글의 취지에서 본다면 그것은 근대 경제의 ‘넥수스 레룸’을 인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랬을 때, 오늘날의 경제학이 흔히 무시하곤 하는 경제의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성격들이 그 ‘무게감’을 가지고 떠오를 것이다.
나아가, 이렇게 다양한 차원들을 염두에 두고서 경제를 바라보게 되면, 어떤 이슈에든 단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게 아니라 존중받아 마땅한 여러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드러날 것이다. 이런 다원적인 분위기에선 보통사람들이 경제에 대해 공공연히 의견을 표출하기도 더 수월해지리라. 보통사람들의 경제에 대한 의견 표출의 중요성은 케임브리지의 경제학자 장하준이 최근 저작 <경제학 강의>에서 강조하기도 했다. 진정으로 인류를 진보시키는 경제적 비전은 경제에 대한 여러 견해들이 서로 건전한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더 잘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경제학이 그런 정도의 포용력만 있었어도, 트럼프 같은 인물이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고 외국인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으면서도 동시에 노동 대중의 대변자를 자처하고 경제적 진보를 이루겠다고 공언하는 촌극이 벌어질 가능성은 크게 낮았을 것이다.
트럼프 같은 인물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든, 지난 200여 년 동안 탄탄하게 구축되어 왔던 민주주의, 근면, 생산력, 평화, 연대, 애국 같은 일련의 가치들이 최근 10년 사이에 크게 흔들리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위기의 충격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미치게 마련이지만, 동시에 위기는 그간 쌓인 모순들을 해소하고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경제학은 그런 전진을 위한 도구이며, 지금은 특히 더 ‘좋은’ 도구가 필요하다. 경제학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솔직하고 종합적으로 살펴야 할 이유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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