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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김공회의 넥수스레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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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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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았다. ‘촛불’의 힘으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시킨 직후 치러지는 선거라 국민의 기대가 특히 높다. 그런 만큼 이번 대선은 앞으로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비전’의 각축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는 정쟁만 난무할 뿐 가슴 뛰는 비전, 미래 청사진을 내놓는 후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특히 경제와 관련, ‘성장’에 대한 약속이 보이질 않는다. 지난 정부들로부터의 교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명박 정부의 747 공약의 악몽 말이다. 임기 내에 ‘실질성장률 7%·국민소득 4만 달러·선진 7개국 진입’을 달성하겠다는 이 공약은 세계경제위기 속에서 처절하게 실패했고, 이후 ‘허황된’ 공약의 대명사가 되었다. 잇따른 박근혜 정부도 474 공약(잠재성장률 4%·고용률 70%·국민소득 4만 달러 달성)을 내놓아 내내 진보진영과 야권의 야유를 받았다. 이러한 전례를 겪으며 범야권에서는 경제성장률을 구체적인 수치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는 ‘합의’가 더 공고해진 것 같다. 과연 이것이 바람직한가?
보수정권의 ‘성장지상주의’를 흉내 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촛불 승리’로 구태의연한 성장론이 쏙 들어간 지금, 우리는 좀 더 허심탄회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진정한’ 경제성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보수는 성장, 진보는 분배’라는 잘못된 이분법도 깰 수 있으면 금상첨화다. 따지고 보면 마르크스에서부터 레닌까지 경제성장은(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보통 진보의 ‘전매특허’였고, 보수는 경제성장을 포함한 모든 급격한 사회 변화에 부정적이었다.
747 공약에서와 같이 구체적인 경제성장률 수치를 내놓는 것과 경제를 더 성장시키고 대중의 생활수준과 행복도를 높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다르다는 데서 출발해 보자. 이 둘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은, 지금 세계경제에 불확실성이 너무 커 미래 성장률을 예측하는 게 매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현재 세계적으로 경제규모의 지표로 쓰이고 있는 국내총생산(GDP)이 실제 경제의 현황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GDP라는 지표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그것이 ‘발명’된 1930년대 이래 꾸준히 제기되었다. 전문가들 사이의 ‘기술적’ 논쟁들을 제외하면, 비판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겠다. 첫째, GDP는 그것이 측정하고자 하는 것, 곧 주어진 사회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를 제대로 측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GDP에 가내노동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를 두고 폴 새뮤얼슨은 ‘당신이 당신 여비서와 결혼하면 국민소득은 줄어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른바 ‘사회적 경제’ 또는 ‘공유 경제’ 영역이 GDP 계산에 적절히 고려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GDP에 대한 두 번째 부류의 비판은 GDP가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의 수준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광고는 GDP에 포함되지만 온갖 광고가 난무할 때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거기 포함되지 않더라는 로버트 케네디의 불평은 그 대표적인 예다. 공업발달이 수반하는 환경파괴가 GDP 계산에서는 무시된다는 환경론자들의 근심도 비슷한 유형의 비판이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GDP라는 지표는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하나의 ‘숫자’가 아니라 그 자체로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 물론 현실적으로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정치적 과정’의 결과 어떤 요인이 GDP 산출에서 빠진다 해도, 그것이 해당 경제의 규모와 활력, 주민들의 삶의 풍요로움에 미치는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GDP로 나타나는 경제규모나 성장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를테면 지난달 27일 끝내 국회 소관 상임위(환경노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한 노동시간 단축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애초 여야는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현행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일 것에 합의했으나, ‘기업 부담을 키운다’는 재계의 반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노동시간 단축에 반대하는 재계는 물론이고 찬성하는 국회의원들도 그것이 경제성장에는 이롭지 않으리라는 데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야 의원들이 근로시간 단축에 원칙적인 합의를 이룬 것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장시간 노동은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는 일종의 ‘도덕론적’ 근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말로 근로시간 단축이 경제성장에 해로울까? 법정 근로시간을 줄이면 일부 개별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종전과 같이 심야나 주말에 일을 시키려면 돈을 더 주고 새로 사람을 고용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런 걱정 때문에 기업이 정말로 생산을 줄이면 GDP로 측정되는 경제의 규모가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산업별·기업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기업의 생산량 결정은 생산요소인 노동력의 가격보다는 생산물 시장의 사정에 더 크게 좌우되므로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지는 미지수다. 또한 기업이 생산을 줄인다 해도 법정 최장 노동 시간 단축에 따라 노동자들이 더 많은 여가를 통해 더 많은 후생을 누린다면, GDP는 줄었을지언정 사회 전체의 공공복리까지 줄었다고 할 수는 없다. 나아가 충분한 휴식이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인다면, 근로시간 단축은 GDP 측면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일부 ‘좌파’의 편향된 주장이 아니다. 사실 위와 같은 사항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닌 GDP의 ‘발명자’로 꼽히는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였다. 그는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0년대 초 미국 경제의 전반적인 현황을 가늠케 해줄 지표를 개발해달라는 의회의 부탁을 받고 일군의 학자들과 함께 GDP 즉 ‘국민소득(national income)’ 지표를 만들었다. 이 지표가 미국을 대공황에서 구해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이후 미국의 경제·사회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지금 세계적으로 GDP가 애용되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이런 기여에도 불구하고 쿠즈네츠는 국민소득 개념의 한계를 가장 심각하게 고찰한 학자이기도 했는데, 1946년 한 저술에서 그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며 자신이 개발한 국민소득 개념의 한계 중 하나로 ‘노동의 부담과 불쾌가 무시된다’는 점을 꼽았다(
Simon Kuznets, National Income: A Summary of Findings, NBER, 1946, p. 127).
‘어떤 이는 [국민소득 개념의] 가장 유감스러운 누락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있다]. 순생산물을 생산해내는 데 따르는 인적 비용의 의도적 배제 말이다. 하나의 예가 장시간 노동이다. 일정량의 순생산물을 생산해내는 데 여가를 거의 허용하지 않는 주당 노동시간이 요구된다면, 생산자는 소비자로서, 즉 일정한 욕구와 선호를 가진 개인으로서 많은 만족감을 향유하지 못 할 것이다’(p. 126).
이런 시각을 확장하면, 우리가 ‘복지’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정책들이 보통의 경제지표로는 포착되지 않는 경제·사회적 풍요를 증진시킬 것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풍요가, GDP에 틀림없이 반영될 현란한 광고나 인명살상용 무기보다 열등하다고 볼 이유가 있는가? 나아가 대중의 복지 증진은 통상적인 의미의 생산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기여가 저절로 이루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요구되는 게 국가의 능력이다. 아쉽게도, 세계경제가 이례적인 침체에 빠져있을 때 국가를 한동안 운영할 최고경영자를 뽑는 이번 대선에서, 자신이 집권하면 그러한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겠다는 얘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 요즘 ‘통합’이라는 미명 아래 정치세력들 간의 ‘야합’을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많이 본다. 하지만 상이한 입장들의 애매한 타협이 아니라 발전적 지양이라야 ‘진정한’ 통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과감한 복지제도 시행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조치들이 그저 국가에 의한 강제적 재분배나 ‘기업 때리기’가 아니라 이 사회를 더 풍요롭게 만들고 탄탄한 경제성장을 가져다주리라는 비전으로써 반대파들을 설득한다면, 그것은 통합을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정책들을 경제성장으로 연결시켜 내는 것이 지도자의 역할이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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