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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4년 11월 1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부채주도 성장에서 소득주도 성장으로'란 제목의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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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김공회의 넥수스 레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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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14년 11월 1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부채주도 성장에서 소득주도 성장으로'란 제목의 토론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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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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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로 ‘소득주도성장론’이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다. 여기서 말하는 ‘소득’의 성격이 무엇인지부터가 불분명하다. 또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취했을 때 어떻게 경제가 성장할지에 대해서도 쉽게 장담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여러 해석이 분분하다.
‘소득주도성장론’의 모호성
‘소득주도성장론’의 의미가 모호한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개념적으로 잘못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애초 소득주도성장론은 ‘임금주도성장론’으로 불렸다. 임금주도성장 전략의 주창자들은 이를 ‘이윤주도성장’과 대비시키면서, 경제성장에서 임금(인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적 범주로서 이윤이나 임금은─그리고 이자나 지대, 배당 등도─모두 ‘소득’이다. 따라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용어로는 애초 그 개념을 내세웠던 이들이 강조하였던 ‘이윤보다는 임금’이라는 관점이 살아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소득’이라는 범주에는 ‘임금주도 대 이윤주도’라는 구도에서는 고려되지도 않았던 이자·지대·배당까지도 포괄되기 때문에 사태만 더 복잡해진다.
물론 우리나라에선 특수하게도 임금을 받지는 않지만 임노동자나 진배없는 (영세) 자영업자의 비중이 높다는 사정이 있긴 하다. 아마도 이것이 ‘임금주도성장’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소득주도성장’으로 탈바꿈한 주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최저임금 인상 문제에서 늘 드러나듯이 원칙적으로 자영업자와 임노동자의 이해관계는 대립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서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섞으면, 문제가 해결되기보다는 더 꼬이는 수가 있다. 자영업자 등의 문제는 별도로 풀 일이다.
‘소득주도성장론’의 학설사적 기원?
현대의 경제문제는 고전 경제학을 참조하면 좀 더 쉽게 이해되기도 한다. 예로부터 경제학자들은 경제를 생산과 분배, 소비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경제행위의 단위로서 개인보다는 집단, 곧 생산·분배·소비 등 경제의 각 영역에서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의 집단을 상정하였다. 그러한 집단을 계급(class)이라고 부른다. 흔히 자본주의 경제의 3대 계급이라고 하는 ‘자본가’, ‘노동자’, ‘지주’가 그들이다.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역작 <21세기 자본>에서 이러한 고전적 시각의 복원이 분배 문제를 다루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 그것은 ‘소득(임금)주도성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계급들이 생산·분배·소비의 각 영역에서 어떻게 상이하게 행동하는가? 일단 생산에서 각 계급은 각자가 가진 생산요소의 조달자로 나타난다. 즉 자본가는 자본을, 노동자는 노동을, 지주는 토지를 댄다. 보통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해 생산이 이뤄지고, 농업 같은 분야에선 지주도 개입하는 것이다(마르크스였다면 이 대목에서 ‘착취’에 대해 언급할 것이지만, 여기에선 표준적인 고전파 모형을 따른다). 생산의 결과 이들 계급은 각각 이윤·임금·지대를 소득으로 챙겨간다. 소득이 생겼으니 소비를 할 텐데, 세 계급은 소비패턴에서도 상이한 특징을 보인다. 자본가는 자신의 소득인 이윤을 기계나 설비 구입에 소비한다. 이는 ‘투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소득인 임금을 온전히 자기 삶의 재생산, 곧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없어선 안 될 필수품 소비에 사용한다. 끝으로 지주는 지대를 각종 사치품이나 잡다한 서비스, 예술의 후원 등에 쓴다. 이를 다음 그림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고전파 경제학에선 대체로 생산과 분배와 소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각 계급이 소득을 전부 소비해야만 한다. 먼저, 노동자와 지주는 소득을 전부 소비할 것이 자명하다. 정의상 노동자는 임금을 모두 소비하지 않으면 삶의 재생산이 불가능하며, 지주는 소득의 근거가 되는 재산(토지)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자신에게 소득이 흘러들 것이므로 미래 걱정 없이 수입을 모두 소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어떠한가? 고전파 경제학의 대표자인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는 자본가도 별 문제 없이 자신의 소득(이윤)을 전부 투자함으로써 순조롭게 자본을 축적하여 경제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비해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 중에서도 맬서스는, 자본주의 경제에는 자본가가 자신의 이윤을 전액 소비(=투자)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수요가 공급에 못 미친다며 대립각을 세웠다. 케인즈가 <일반이론>에서 밝히듯, 이런 생각은 훗날 다양한 변종의 ‘과소소비론’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관건은 자본가가 투자하지 못하는 이윤의 잉여분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유효수요’로 전환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과소소비’ 해소의 세 가지 방법
사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투자부진, 저성장, 기업이윤의 축적 등)과 거의 같다. 경제에서 농업의 비중이 많이 줄어든 오늘날엔 지주 자리에 이런저런 부동산임대업자, 금융자산가, 배당소득자 등을 넣으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즈라면 이들을 뭉뚱그려 ‘금리생활자’(rentier)라고 불렀을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본가의 과소소비(=과소투자)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다. 첫째는 자본가 자신이 더 많이 소비(=투자)하도록 사회적으로 독려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본가가 끝내 소비하지 않는 부분을 다른 계급들에게 이전시키는 것이다. 케인즈가 <일반이론>에서 강조한 것이 전자의 방식이다. 즉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기업가들의 ‘야성적 충동’을 자극해 그들 스스로 소비(=투자)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본가가 소비하지 않는 잉여 이윤을 다른 계급들에게 이전시키는 방법에는, 그 소득을 어떤 계급에게 이전시킬 것이냐에 따라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자본가의 이윤을 지주에게로 이전시킴으로써 유효수요 부족 해소를 도모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맬서스의 해법이다. 이런 소득 이전을 가능케 하는 합법적인 메커니즘으로 그는 당시 영국 의회 안팎에서 ‘뜨거운 감자’였던 곡물법을 꼽았다.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에 관세를 매김으로써 결과적으로 영국내의 곡물가격과 지대를 높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대의 신흥 자본가들과 자유무역주의자들에게 곡물법은 당장 폐지해야 할 ‘악법’이었다. 이에 반해, 맬서스가 보기에 그것은 사회적 소득을 검소한 자본가로부터 방탕한 지주에게로 이전시킴으로써 경제의 과소소비를 해소하는 훌륭한 메커니즘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맬서스는 약 200년 전에 일종의 ‘소득주도성장론’을 주장한 셈이다. 물론 여기에서 ‘소득’이란 노동자의 소득(임금)이 아니고 지주의 소득(지대)이다.
끝으로 자본의 이윤으로 귀속되었으나 투자되지 않는 소득 - 이것이 자본가에게 계속 머물러 있으면 이른바 ‘사내유보금’, 정확히는 투자되지 않고 금융적으로 기업이 보유하는 사내유보금이 된다 - 을 임금인상 등을 통해 노동자에게 넘기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최근 국제노동기구(ILO) 등을 통해 제기되고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임금주도성장’ 전략이다.
‘임금주도’를 명확히 해야
그렇다면 지금 우리 경제가 장기화되고 있는 침체에서 벗어나 성장을 이루려면 위 셋 중에서 어떤 방식이 가장 적절할까? 문재인 정부는 어떤 방식을 지향하는가? 첨언하자면, 이상의 세 가지 방식은 모두 경제침체의 원인으로 ‘유효수요 부족’을 꼽는다는 점에서 케인즈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지난 4월 대선레이스 도중 김상조 교수가 언급한 대로) “문재인 후보의 경제철학은 케인즈주의”라는 말은, ‘어떤 케인즈주의인가’를 밝히지 않는 한 그 의미는 흐릿할 수밖에 없다.
먼저 기업의 투자를 자극하는 첫 번째 해법은 굳이 말하면 ‘이윤주도성장’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금 우리 경제는 이러한 전략이 말을 잘 듣지 않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200년 전 맬서스가 내놓았던 두 번째 해법은 일종의 ‘소득주도성장’ 전략이라고는 볼 수 있겠지만, 금리생활자에게 소득을 늘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사치품을 소비하게 하는 것이 오늘 한국경제에 적절한 성장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사실 이러한 성장방식은 지난 이명박 정권이 ‘부자감세’를 정당화하는 논리이기도 했다. 또한 보통은 부자인 금리생활자들은 늘어난 소득을 해외에서 소비할 가능성도 크다.
이 둘에 비해 ‘임금주도’ 전략은 어떤가? 노동자들이 더 높은 소득을 얻고 더 많은 소비를 한다는 것은, 경제 전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경제에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는 금리생활자가 소비를 늘리는 것과는 다르다(이런 비생산성 또는 ‘기생성’ 때문에 케인즈는 이들을 사회적으로 ‘안락사’시켜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노동자의 소비 증가는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인 노동력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의 소득 증가가 경제에 만연한 양극화를 부분적으로나마 해소한다면, 그 또한 사람들─특히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해 경제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임금이 올랐다고 해도 노동자 개개인이 그것을 ‘생산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쓰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노동자들은 적은 소득 때문에 필요한 것들을 소비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는 육아, 교육, 노후, 의료 등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임금 인상시 노동자들은 그러한 기초적인 재화·서비스를 소비할 것인가? 혹시 흥청망청하며 비생산적인 일에 탕진하진 않을까? 만약 그런 것이 걱정이라면, 직접적으로 임금인상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현대 경제에는 ‘국가’라는 경제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기업이 안 쓰는 이윤을 국가가 세금으로 걷어 육아나 교육 등을 노동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제공하면 된다. 본질상 ‘복지국가’란 대다수 국민들로 하여금 삶의 재생산을 위한 기초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강제소비’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제도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는 현재 자신들이 추진하는 것이 ‘임금’주도성장 전략임을 하루빨리 명확히 하는 게 필요하다. 또 그 안에서 국가가 적극적인 복지 공급자로서 역할을 하리라는 점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이는 (특히 영세한) 기업의 임금부담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며, 사실 우리처럼 복지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이 둘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렇게 추진되는 ‘임금주도성장론’이 하나의 ‘성장전략’인 한에서, 우리 사회의 특정 집단만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제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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