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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15 15:07 수정 : 2017.06.15 15:07

Weconomy | 김공회의 넥수스 레룸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게 임명장 수여식을 한 뒤 환담을 나누던 중 김 위원장의 낡은 가방을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13일, 많은 이들의 애간장을 태운 끝에 김상조 신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이 드디어 임명장을 받았다. 지난달 17일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후보자로 지명된 지 거의 한 달, 국회 인사청문회가 있은 지 열하루 만이다.
임명이 이렇게 늦어진 것은 순전히 ‘보수 야당들’의 억지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 재계의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의심을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신임 김상조 위원장이 ‘재벌 저격수’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재계는 공정위의 설립 자체를 막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7년간 공정위 출범 가로막은 재계

공정위는 1981년 4월 1일 ‘독점 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시행됨으로써 출범하였다. 그러나 그 전에 적어도 네 차례의 공정거래법 입법 시도가 있었다. 이 네 번의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것은 재계의 반발 때문이었다. 공정거래법의 최초 입법시도가 있었던 것은 1964년이었다. 광복과 정부수립, 내전, 민중 저항에 의한 이승만 독재정권의 타도, 박정희의 군부쿠데타 등을 거치며 쉼 없이 달려온 한국 경제는 1963년에 재벌의 독과점 폐해가 무엇인지를 절실히 경험한다. 이른바 ‘삼분폭리 사건’에서다. ‘삼분’ 곧 세 가지 가루란 밀가루·설탕·시멘트로서, 당시 경제개발과 국민 생활에 가장 긴요한 품목이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이들은 정부의 통제 아래 몇몇 재벌들(현재의 삼성 등)에 의해 유통되었는데, 이 기업들이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가격을 조작해 폭리를 취하고 세금까지 포탈하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1964년 3월 서울대 한국경제연구소에 공정거래제도 연구를 의뢰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를 토대로 당시 경제기획원은 같은 해 9월에 공정거래법 초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애초 ‘독점금지법’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었던 이 법안에 재계가 반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당시의 신문 지상에서 확인되는 반발의 근거는 하나같이 기발했다. ‘기업 육성과 소비자 보호 중 어느 것이 중요하냐’는 ‘협박’ 식의 문제 제기도 있었고, ‘독점이익의 조장이 기업인의 투자의욕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억지’도 있었으며, ‘자유경쟁(!)을 위해 정부규제는 그만’이라는 기막힌 ‘호소’도 있었다. 결국 재계는 1965년 말 법안 제정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했고, 대신 스스로 ‘경제윤리강령’을 마련하는 ‘아량’까지 베푼다.

이후 공정거래법의 입법 시도는 1966년, 1969년, 1971년에도 이뤄진다. 하지만 매번 재계는 이 법이 기업활동을 위축시킨다며 극렬히 반대하였다. 이를테면 1966년, 공정거래법 제정 논의가 재개되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의 홍재선 회장은 “공정거래법은 제정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했고, 이미 ‘경제윤리강령’이 실효성 없음이 드러났는데도 무역협회는 ‘무역윤리강령’을 내놓으며 또다시 국민을 우롱했다.

사진: 공정거래위원회 20년사

네 번째 시도 이후 10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공정거래법은 빛을 본다. 70년대 말 대내외적 요인에 의한 물가불안과 독과점 심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져 있었던 데다가, 때마침 닥친 10·26 사태와 잇따른 전두환의 군부쿠데타 및 대통령 취임 등 정치적 전환기를 틈타 경제운영을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바꾸자는 의견이 정부 안에서도 힘을 얻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공정위의 출범은 ‘물가안정-재벌통제-민간주도 경제환경 조성’이라는 쿠데타 세력과 재계 간의 이해관계 타협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정경유착’이라는 말이 생기고, 그것을 근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된 것도 바로 이 즈음이다.

사진: 공정거래위원회 20년사

그런 때문인지, 실제로 출범한 공정위는 ‘반쪽짜리’였다. 당시 양식 있는 이들은 독립성과 중립성이 새로 출범할 공정위의 생명이라고 입 모아 조언했지만, 1981년 5월 7일에 발족할 공정위의 수장은 경제기획원 차관이 겸직하게 되었다. 이는 몇 달 뒤 별도의 차관급 인사가 공정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바뀌었으나, 경제기획원의 공정거래실장이 공정위 상임위원을 겸직하게 됨에 따라 사실상 공정위는 기획원의 하부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은 적어도 198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김상조 위원장의 첫 과제는 ‘공정위다운 공정위’ 만들기

공정위가 출범했다고 해서 재계의 ‘방해’가 그친 것은 아니다. 양상이 달라졌을 뿐이다. 업무를 빙자한 만남과 ‘인적 네트워크’ 구축, 재취업 등의 형태로 재계는 공정위에 손을 뻗치곤 했다. 아마도 신임 김상조 위원장이 취임사에서 공정위 직원들의 ‘소명의식’을 강조한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특히 그는 직원들에게 “업무시간 이외에는 공정위 OB들이나 로펌의 변호사 등 이해관계자들과 접촉하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달라고 ‘경고’했는데, 이것 자체가 ‘정경유착’이 공공연히 벌어지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그리하여 김상조 위원장 앞에 놓인 첫 번째 과제는 재벌개혁이 아니라 ‘공정위다운 공정위’를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은 공정위 직원들의 ‘자정노력’만으로 될 일은 아니다. 개인의 윤리의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청렴성을 담보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고, 공정위 권한을 실질화하는 법·제도 정비가 절실하다. 이를 통해 공정위를 정말로 경제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기구로, 진정한 ‘경제검찰’로 굳건히 세워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재벌개혁은 절반은 된 것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적어도 공정위 설립에 이르는 긴 여정을 돌이켜 보면,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하긴 어려울 것 같다.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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