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02 19:29
수정 : 2017.03.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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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인이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이념,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버릴 수 없다면, 공공 연주회장과 근대적 관현악단의 미학적·사회적 가치 또한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전국 각지 지자체의 세금과 공금이 투입되는 ‘시립교향악단’의 존재 의의 또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 장면. 서울시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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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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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인이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인 대의제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이념,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버릴 수 없다면, 공공 연주회장과 근대적 관현악단의 미학적·사회적 가치 또한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전국 각지 지자체의 세금과 공금이 투입되는 ‘시립교향악단’의 존재 의의 또한 민주주의와 공화국,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연주 장면. 서울시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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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양음악 오디세이
1. 들어가며 2. 언어와 음악 사이, 음조와 조율 3. 기보법과 기능화성 4. 평균율과 음악적 자연지배
Ⅱ. 르네상스와 바로크, 서양근대음악의 출발 5. 서양음악의 세속화: 코랄에서 마드리갈까지 6. 음악적 공감의 발견: 오페라와 재현양식 7. 드라마가 된 음악: 자율적 기악음악의 탄생
Ⅲ. 계몽주의 시대, 시민의 음악 8. 합리적 음악과 시민적 주체: 소나타와 교향곡 9.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에서: 1차 빈 악파와 모차르트 10. 음악 박물관의 탄생: 베토벤과 고전음악
Ⅳ. 낭만주의와 민족주의 11. 포스트베토벤 시대의 딜레마: 브람스 대 바그너 12. 1차 지구화와 음악적 민족주의 13. 근대음악의 재봉건화: 진지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의 분열
Ⅴ. 재현양식의 위기와 모더니즘 14. 조성 너머의 조성을 찾아: 드뷔시의 음색과 말러의 음조 15. 기능화성과의 결별: 2차 빈 악파와 20세기의 아방가르드 16. 20세기의 클래식
Ⅵ. 대중의 시대, 서양과 비서양의 만남 17. 대중매체와 대중의 음악 18. 블루스와 음악적 혼혈주의 19. 2차 지구화와 월드뮤직
20. 나가며: 서양음악의 지방화 - 음악의 지구사는 가능한가?
해묵은 퀴즈 하나. ‘음악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바흐’라는 답이 반사적으로 나온다면 당신은 20세기에 공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덤으로 ‘음악의 어머니’가 ‘헨델’이라는 사실(?)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양인들을 ‘음악의 부모’로 모시게 된 한국인의 지난 세기 ‘예술적 입양’의 사연을 돌이켜보면 눈물겹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의 작곡가 홍난파가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을 때 그 애처로운 사연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들 중에는 하로바삐 조선의 ‘빡흐(Bach)’와 조선의 ‘뻬-토벤(Beethoven)’이 나서 가장 잘 우리의 심정을 묘출(描出)하고 가장 잘 우리의 감정에 부화(附和)되는 신조선음악을 창설하지 않고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가 가져야 될 참 음악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홍난파, ‘동서음악의 비교’, <신동아>, 6권 6호, 1936. 6.)
서양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사연이야 어떻건 서양음악은 한동안 음악 그 자체였다. 1980년대까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던 밀러(H. M. Miller)의 서양음악사 책의 제목은 그냥 <음악사>(History of Music)였다. 서양음악이 ‘서양’이라는 지역적 수식어를 붙이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은 서양음악을 ‘세계음악의 한 분과’로 대하며 거리를 두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음악 그 자체’로 친밀하게 느끼는 것도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서양음악이 무엇인지 아직도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것은 ‘클래식음악’인가? ‘클래식음악’이라는 범주 또한 규명하기 쉬운 것이 아니지만, 이어지는 질문을 회피하기도 어렵다. ‘대중음악’은 서양음악이 아닌가?
사실상 서양음악은 우리 주변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도록 만연해 있다. 서양음악의 이해가 필요한 일차적인 이유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서양음악은 한국인이 일상에서 입고 있는 서양식 의복과 같은 것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인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전통의 옷을 벗어던졌는지 놀라운 일인 것처럼 음악 또한 그랬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까? 이 물음은 서양음악의 정체를 묻는 앞으로의 연재 글들에서 드러나지 않는 방향타의 구실을 할 것이다.
한국인은 지난 세기 동안 시달려왔던 서양음악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이다. 21세기로 진입한 이후 클래식과 대중음악 모두에서 한국 음악인들의 테크닉은 세계 수준에 근접했다. 클래식의 경우 세계적인 콩쿠르 우승 소식이나 세계적 음반 레이블의 음반 발매 소식이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대중음악에서도 케이팝의 기술적 수준은 이미 세계 일류로 인정받고 있다. 글로벌 디지털 매체의 발전과 함께 청중들 역시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들은 음악사에서 거론되는 거의 모든 음악들을 유튜브 검색 등을 통해 손쉽게 찾아 들을 수 있다. 음반산업이 쇠락해 가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크고 작은 라이브 연주회 무대의 활성화를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각화된 디지털 플랫폼을 통하여 음악 듣기와 음악하기(musicking)의 새로운 민주주의적 지평이 열리고 있다.
‘서양음악 콤플렉스’ 벗어난 한국인
단순지식 넘어 새 물음 필요한 때
민주적 가치와 ‘탈식민’도 고민해야
최근에는 기존의 음악제도적 경계를 전례 없는 방식으로 넘나드는 젊은 음악인들도 많아졌다. 시립교향악단의 클래식 지휘자가 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하기도 하며, 유명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인기 트로트 가수와의 협연도 불사한다. 서양음악 밴드가 판소리 음반을 발표하기도 하며, 전통 가곡을 부르는 가객이 서양 현대 가곡을 노래하기도 한다. 클래식과 대중음악, 나아가 서양음악과 비서양음악 사이의 만남과 대화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전문가들도 틀에 박힌 단편적인 지식 제공이 아닌 폭넓은 인문학적 음악 이해와 비평적 시각의 제시를 청중들로부터 요구받고 있다. 음악에 대한 백과사전식 정보들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게 사실이다. 요컨대 이제 단순히 서양음악에 대한 정보를 얻고 배우는 단계를 넘어서 다른 차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새삼스럽게 ‘서양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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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작곡가 홍난파는 우리의 감정에 잘 맞는 ‘신조선음악’의 창설을 주장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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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공통음악어법과 근대성
이 연재 기획은 ‘서양근대음악’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시대적으로는 오페라의 탄생을 배경으로 하는 17세기 무렵의 바로크시대 이후를 주로 다룰 것이다. 17세기의 과학 혁명과 이에 바탕을 둔 서양 사회 전반의 기술적 혁신은 음악적 혁신으로 연결되었고, 이는 4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비서양 음악문화와도 부분적으로 공유되는 모종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서양의 음악사가들이 ‘공통음악어법 시대(common practice era)’라고 말하는 3세기 가량의 기간(1600~1900년)이 그러한 음악적 보편성을 집중 탐구했던 기간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공통음악어법’이란 앞으로 연재에서 다룰 ‘기능화성적 조성’(‘장조’와 ‘단조’의 이분법적 구분 속에서 각각 열두 개의 조를 기능적으로 연관시키는 체계)이라고 불리는 대중적 음악언어를 뜻한다. 20세기의 ‘대중음악’도 이러한 조성적 음악언어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서양근대음악’에 포함시켜 다룰 수 있다.
기보법의 표준화와 악보 읽기 능력의 확대에 기반을 둔 서양음악의 공통음악어법은 당시의 계몽주의에 발맞춘 ‘시민음악’에 대한 이상과 연결되었다. 하버마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시민혁명기에 탄생한 공공 연주회장(public concert hall)은 봉건 귀족들의 ‘과시적 공공성’을 넘어서 자율적 시민의 근대적 공공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탐구하는 핵심적 ‘문예공론장’ 가운데 하나였다. 21세기의 한국인이 서구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인 근대 대의제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이념,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버릴 수 없다면, 그러한 신념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공공 연주회장과 근대적 관현악단의 미학적·사회적 가치 또한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전국 각지 지자체의 세금과 공금이 투입되는 ‘시립교향악단’의 존재 의의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민주주의와 공화국, 시민과 공공성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촛불시민들’에 의해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이루어지는 지금, 서양근대음악의 제도와 그 민주적 가치도 함께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문화제국주의적 전파의 과정에서 서양근대음악이 비서양 음악문화에 가한 상처는 적지 않다. 비서양의 한국인으로서 이러한 탈식민주의적 문제 설정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서양음악을 폄훼하거나, 반대로 ‘한국음악’(전통음악)의 가치를 국수주의적으로 내세우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라는 식의 막연한 민족주의는 사실상 서양중심주의의 거울쌍일 뿐이다. 핵심은 서양음악에 대한 이야기의 중심을 ‘지금 여기’로 가져오는 것, 발화의 위치와 주체를 한국과 한국인으로 두는 것에 있다. 이를 통해 한국음악에 대한 성찰도 냉철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음악은 예전보다는 훨씬 느슨해졌지만 여전히 영향력 있는 수학적 공통 언어 내지는 지구적 만남의 음악적 교차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지금 여기’의 한국인은 이런 서양음악의 의미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며, 이를 통해 어떤 글로벌한 음악적 공감의 차원을 열어가야 할까? 이 연재가 던지고 탐구하고자 하는 궁극적 물음이다.
최유준/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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