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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이론가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의 저서 <우주의 역사>(Utriusque cosmi) 중에 나오는 그림. 신이 모노코드(monochord)를 가지고 우주를 조율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주와 음악은 신의 섭리가 수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로버트 플러드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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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2) 음조와 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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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의 이론가 로버트 플러드(Robert Fludd, 1574~1637)의 저서 <우주의 역사>(Utriusque cosmi) 중에 나오는 그림. 신이 모노코드(monochord)를 가지고 우주를 조율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주와 음악은 신의 섭리가 수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로버트 플러드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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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3일 제6차 광화문 촛불집회의 무대에 오른 가수 한영애가 마지막 곡으로 <조율>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후렴부 가사는 이렇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 한영애가 느린 템포의 무반주 독창으로 후렴부를 마무리하면서 바꿔 부른 마지막 가사가 인상적이었다. “조율 한 번 해냅시다!”
한자어 ‘조율’(調律)에서 ‘율’은 원래 음악에서 쓰는 음(音)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한자가 ‘법률’(法律)이라는 단어에도 들어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법칙’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음이 왜 법칙일까? 천지만물에 변덕스러운 주술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던 옛날,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의 전환기 고대인에게 객관성과 법칙성을 깨닫게 해준 것이 악기의 음들이었다. 속이 빈 대나무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으면 듣기 좋은 음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인들도 음들 속에 수학적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직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음이 만물의 객관적 척도이자 공동체의 법칙을 표상하게 된 이유다. 음악과 조율은 한편으로 수학적이거나 합법칙적인 사유와 관련을 맺으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이거나 마법적인 세계와도 연결되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수학 그 자체가 신학적 상징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음악은 우주의 수적 조화를 상징했고, 조율은 사람의 일이라기보다는 초월적 존재(‘하늘님’)나 그 대리인의 소관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조율체계를 가리키는 ‘율려’(律呂)가 음양오행과 천지창조의 신화적 사고와 연결됐던 것도, 중세와 근대 초기까지도 서양의 조율이나 음악이론에 대한 생각이 ‘신의 모노코드’(그림)와 같은 종교적 상상력에 붙들려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대음악의 역사는 세속화된 자연과 인간 세계 속에서 조율 행위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조율 한 번 해냅시다!’ 하는.
조율과 조
서양 근대음악의 일반적 특징 몇 가지를 앞으로 세 차례의 글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오늘 첫 번째로 다룰 것이 조(調, 음조 혹은 ‘쪼’)의 문제인데, 조율(調律)이라는 보편적 문제와 함께 접근하고자 한다. 현재 우리는 서양 근대음악에 워낙 익숙해져서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서양 근대음악의 조 개념은 상당히 특이하다. 예컨대 “그 음악이 무슨 조(쪼)예요?” 하고 물으면, “A장조입니다”와 같은 식으로 답하는데, ‘조’에 대한 물음의 답변치고는 꽤나 단순하고, 싱겁게 들리기까지 한다. 여기서 A나 B와 같은 알파벳은 으뜸음을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고, 서양 근대음악에서 조로서 구별되는 특성이 있는 것은 사실상 단 두 가지뿐이다. 보통 ‘밝은 느낌’이라고 하는 ‘장조’와 ‘어두운 느낌’의 ‘단조’.
만약 조에 대한 물음이 인도 음악에 대한 것이었다면 수백 가지 라가(raga) 중의 하나가 거론될 것이며, 한국 전통음악의 경우에도 평조, 우조, 계면조에, 민요의 경우라면 육자배기조와 수심가조와 같은 다양한 조 명칭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중세음악을 예로 든다 해도 도리아, 프리기아, 리디아 등 최소 여덟 개 이상의 교회 선법(旋法, mode) 이름 가운데 하나가 답해질 것이다. 용어가 다르다 보니 서로 다른 것들이라고만 생각하기 쉽지만(물론 각각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조’라는 개념을 넓게 보면 모두 같은 의미 맥락 속에 있다. 이렇듯 동일한 의미 지평에서 비교해보면 서양 근대음악에서의 조(key) 개념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인다. 왜일까?
조는 조율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조율 하면 기타나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의 줄맞추기(tuning)로서의 조율을 떠올리기 쉽지만 조율의 일차적인 의미는 악기의 줄맞추기 이전에 그 줄이 맞추어져야 할 음들을 정하는 것(temperament/intonation)이다. 무엇보다 ‘도레미파솔라시’와 같은 개별 음들을 자연의 무한한 소리 연속체로부터 골라내는 것이 조율이다. 하지만, 조율의 문제가 음악에 쓸 재료로서의 음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음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음들의 배열에서 중심음 설정과 장식음 사용 등에 이르기까지) 하는 실천적인 문제가 곧바로 대두된다.
촛불집회서 ‘조율’ 부른 한영애
가사 바꿔 “조율 한번 해냅시다”
옛날 ‘음악’은 우주의 조화였고
‘조율’은 초월적인 존재의 소관
근대음악사는 ‘조율’ 재구성 과정
표준어 문법 정립 과정과 비슷해
이제 ‘조’는 일정한 기준에 맞게 음들을 조화시킨 상태라고 정의해볼 수 있다. 이때의 ‘기준’이란 그 ‘조’를 조화로운 상태라고 여기는 음악 공동체의 공통관습에 맞추어진다. 그래서 ‘조’는 사투리 음조나 어조가 그렇듯 종종 한 공동체의 지역적·민족적 특성을 나타내게 된다. 플라톤이 쓴 <국가>의 3권에는 고대 그리스의 음악에서 쓰였던 여러 ‘조’에 대해서 논하는 대목이 나온다. 슬픈 감정을 유발하는 ‘리디아조’와 술자리에나 어울리는 ‘이오니아조’는 추방되어야 하며, 꿋꿋한 기상을 나타내는 ‘도리아조’와 ‘프리기아조’만 남아야 한다는 식의 얘기다. 이때 각각의 조는 그 명칭이 암시하듯이 지역별 혹은 종족별 음악의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러한 전체주의적 음악론은 오늘날 비웃음을 받곤 한다. 그것은 마치 ‘육자배기조’(전라도 지역의 민요조)는 슬픈 감정을 유발하며 ‘수심가조’(평안도와 황해도의 민요조)는 술자리에나 어울리기 때문에 ‘메나리조’(경상도와 강원도의 민요조)만 남기고 다 추방해야 한다는 식의 막말 논평에 가깝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서양 근대음악이 플라톤과 유사하다고 할 만한 ‘조들의 추방’과 함께 양식화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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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광장에서 <조율>을 부르는 한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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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조가 아니라네!
9세기께 서양 중세 음악이론가들은 고대 그리스의 조 이름을 빌려서(이름만 빌려 썼을 뿐 고대 그리스의 실제 조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레고리오 성가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의 수많은 성가들을 도리아, 프리기아, 리디아, 믹소리디아 네 가지 조, 그리고 이를 각각 정격과 변격으로 세분하여 모두 여덟 가지의 조로 분류했다. 이른바 중세 교회 선법(church modes)의 탄생이다.
이러한 교회 선법 체계는 귀납적인 악곡 분류체계로 출발했지만 기보법의 발전을 바탕으로 작곡 개념이 발생하면서 악곡 구성원리로도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다성음악(polyphony, 여러 독립적인 성부들 즉 선율들이 동시에 울리는 음악)이 크게 발전한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선법 체계의 위상은 흔들리게 된다. 성부는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고 수직적 화음의 조화까지 고려하게 되면서 각각 독립적 색채를 가진 여러 조(선법)들을 통합적으로 조화롭게 운용하기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화성의 문제가 대두하면서 조체계의 변화가 요구된 것이다.
매우 점진적인 과정이었고 많은 이론적 논쟁이 있었지만, 17세기를 지나면서 선법으로서의 조는 이오니아조(장조)와 에올리아조(단조) 두 가지로만 축소되고 으뜸음의 높낮이에 따른 키(key)로서의 조로 바뀐다. 화성적으로 통합된 새로운 조 체계에서 예컨대 C장조와 D장조, E장조는 각각 기준 음높이만 다를 뿐 선법체계로 보면 모두 이오니아조다. 이러한 서양음악의 근대화 과정은 언어의 근대화 과정과 닮아 있다. 그것은 중심지 언어를 기준으로 표준어 문법 체계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표준어 제정의 근대적 충동이 그렇듯, 그것은 지역과 관습의 차이를 넘어서 가급적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좀 더 보편적인 조율과 조성, 음조를 찾겠다는 무의식적 지향과 관련되지만, 거기에는 플라톤의 망령도 깃들어 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의 마지막 4악장은 그러한 근대적 지향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합창이 시작되기 직전 지속되던 관현악의 불협화음을 불쑥 바리톤의 서창(序唱)이 멈춰 세운다. “오 벗들이여! 이 음조가 아니라네! 좀 더 즐겁고 기쁨에 찬 음조로 노래하지 않겠나!” 이어서 분위기를 바꾸어 부르는 노래가 실러의 시를 가사로 한 유명한 ‘환희의 송가’인데, 베토벤은 여기서 조를 단조에서 장조로 바꾼다. 꿋꿋한 기상의 장조 선율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될지니” 하고 합창하는 계몽주의와 박애 정신의 노래는 기악과 성악이 어우러진 협화음의 숭고한 울림과 함께 그야말로 감동을 자아낸다. “조율 한 번 해냅시다” 하던 촛불광장에서의 요청에도 응답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 노래의 마지막 절정부 합창 가사는 그들의 “하늘님”을 소환한다. “아름다운 신의 광채여! 신의 광채여!” 어쩌면 청중석에 앉은 누군가는 또 다른 ‘조율’을 그리며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을까? “이 음조가 아니라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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