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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30 20:27 수정 : 2017.03.30 20:55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3) 기보법과 기능화성

서양음악, 특히 클래식을 연주하는 이들의 특징적 면모이면서 가장 멋진 모습이 있다. 오랜만에 만났거나 처음 만난 이들끼리도 악보를 나누어 보면서 즉시 호흡을 맞추어 연주하는 모습이다. 동료의 악기 반주에 독창을 할 수도 있겠고, 마음 맞는 음악 친구들끼리 모여 현악 사중주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수십 명의 합창단이나 기백 명을 헤아리는 오케스트라 멤버들이라고 해도 악보를 나누어 보면서 곧바로 완성도 있는 음악 작품을 함께 소리 내어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 클래식 연주자들의 미덕이다.

클래식만일까? 팝과 재즈와 같은 대중음악에서도 악보가 중요하다. 물론 대중음악의 경우 전문가라고 해도 복잡한 오선보를 잘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악보는 여전히 중요하며, 실제로 자주 악보를 활용한다. 그것은 테마만 적혀 있는 간단한 선율 악보이거나 노랫말만 적혀 있을 수도 있는데, 그 위 어딘가에 ‘C’나 ‘Am’와 같은 알파벳 기호(종종 숫자가 첨가된)가 적혀 있을 것이다. 흔히 ‘코드’(chord)라고 부르는 표준화된 화음(和音) 기호다. 화음 기호만 적혀 있는 것이 과연 악보일까 의심스러울 수 있겠지만, 그 기호들에는 연주에 활용될 음들과 관련된 매우 많은 정보가 집약되어 있다. 17세기와 18세기 바로크 시기의 서양음악에서 ‘숫자 저음(figured bass) 악보’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오늘날의 코드가 적힌 악보와 흡사하다. 숫자로 된 화음 기호를 보면서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류트나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은 오늘날의 재즈 연주자들과 닮았다.

사실상 서양음악만큼 실제 연주에서 악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례를 비서양의 문화권에서는 찾기 힘들다. 요컨대 서양음악은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악보를 통해 ‘눈으로 읽는 음악’으로서의 특징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읽는 음악으로서의 서양음악’은 기보법의 발전과 악보의 대중적 확산, 그리고 이에 따른 기보법의 표준화 과정을 전제로 한다. 여기에 코드 혹은 화음의 표준화 과정(후에 ‘기능화성’이라고 불리게 된 화성의 논리가 보편화되는 과정)을 덧붙여야 하는데, 이 역시 기보법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16세기 익명의 화가가 세 명의 여성 음악가를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음악 연주 모습을 그린 서양의 그림에는 거의 예외 없이 악보가 함께 보인다. 한국의 풍속화나 의궤(조선시대 궁중 행사를 기록한 서책) 속에 담긴 음악 연주 풍경에서 악보를 찾아보기 힘든 것과 뚜렷이 대조된다.

중세 기보법의 발전과 인쇄혁명

서양의 기보문화가 중세 교회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경을 비롯한 텍스트와 기록을 중시하는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배 전례에서 부르는 성가의 원형 유지가 요구됐기 때문이다. 서양의 중세 기독교 성가를 기록한 ‘네우마’라 불리던 악보는 낭송창의 억양을 표시하는 수준에 머물렀다가 10세기에 이르러 가로선을 그어 상대적 음높이를 표시함으로써 오선보의 싹을 틔웠다.

성가의 기록과 보존의 기능에 머물던 서양 중세의 기보문화에 혁신을 가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1세기경 귀도 다레초라는 이름의 수도사가 ‘계명창’ 방식을 창안한 것이다. 오늘날 ‘도-레-미-파-솔-라-시’와 같은 계이름(계명)의 원형이 그에 의해 처음 만들어져 성가대 교육 및 실제의 음악현장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서양음악에서 ‘악보 읽기’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다레초 이후에도 기보법은 표준화되지 않아 필사자마다 달랐고, 무엇보다 음표의 지속 시간을 적절하게 표기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중세의 기보법은 또 하나의 혁신이 필요했고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쾰른의 프랑코(Franco von Köln)에 의해 각각의 음표들을 정해진 리듬 단위에 묶어 표기하는 최초의 정량(定量) 기보법이 탄생한 것이다. 프랑코는 쉼표의 개념도 정교화하여, “시간은 소리만이 아니라 소리가 없는 것도 잰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량 기보법 발명은 음악 내적 의의에 그치지 않는다. 배경에는 서양의 중세 후기부터 시작된 ‘시간 측정’에 대한 서양인들의 비약적 관심이 있었으며, 음악적 시간을 균질하게 나누는 정량 기보법의 아이디어는 과학혁명기의 ‘절대시간’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음악의 정수, 악보 이용
표준화된 음악적 기호 확립

음악적 문해력 집요한 추구
악보와 연주 음 차이 최소화

16~18C 근대 화성이론 정립
인쇄술, 근대문화 설계도 구실

16세기 이동활판의 음표 활자. 뮤직프린팅히스토리(www.musicprintinghistory.org) 화면 갈무리
정량 기보법의 발전은 14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다성음악 양식의 꽃을 피웠다. 기욤 드 마쇼로 대표되는 이 시기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 ‘아르스 노바’(ars nova, 새로운 기법)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도 기보법의 혁신을 가리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14세기 기보법의 발전은 악보의 대중적 확산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오히려 복잡하고 난해한(종종 연주와 청취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각적 유희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다성음악 작곡을 부추겼다.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인쇄 혁명이 이러한 흐름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450년경 개발된 구텐베르크의 이동활판 인쇄술은 1470년쯤이면 이미 성가 악보 인쇄에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세기가 시작되는 1501년에는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페트루치에 의해 최초의 상업적 악보 출판이 이루어졌다. 서양음악이 대중적 차원에서 ‘읽는 음악’으로서의 특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음에서 음표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월터 옹이 지적했듯, 구텐베르크의 이동활판 인쇄술은 산업혁명을 예시하는 합리적 공정을 가능케 했다. “환치 가능한 부분으로 이루어진 동일한 복합적인 제품을 일련의 조립 공정을 통해서 생산해 가는 제조 기술, 즉 조립 라인의 최초의 것은 스토브나 신발이나 무기가 아니고 인쇄본을 생산하는 라인이었다.” 16세기 이후 음악이 상업적·대중적으로 인쇄되기 시작하면서, 음악의 음들은 이동활판의 활자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음들이 각각 분절된 조각으로서 언제든 다른 음들과 짜맞출 수 있는 마치 레고블록처럼 여겨졌다고 할까. 이후 서서히 탄생하게 된 ‘작곡’ 개념이 ‘구성’(composition)이라는 뜻을 가진 용어와 연결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즉, 작곡이란 ‘환치 가능한’ 여러 음들을 ‘복합적인 생산품’으로 ‘구성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동활판 인쇄술의 발전과 악보의 대중화로 인해 서양의 기보법은 음악적 현실에 깊숙이 개입했다. 서양의 기보법은 실제적 층위에서 음악을 작곡과 연주로 나누었으며, ‘기보될 수 있는 것’과 ‘기보될 수 없는 것’으로 나누었다. 나아가 ‘기보될 수 없는 것’은 음악적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기까지 했다. 음악을 다루는 서양의 일상 언어에서 ‘tone’(음)과 ‘note’(음표)가 자주 혼용되어 왔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16세기 이후부터 서양 근대음악에서 표준화된 화음(코드)들의 운용을 특징으로 하는 기능화성의 논리가 점차 관철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시적으로 울리는 여러 화음들이 ‘기능적으로’ 연관된다는 합리적 사고는 음악에서 사용되는 음들을 대하는 악보 인쇄소의 식자공(植字工)과 같은 태도, 즉 각각의 개별 음들을 똑같은 모양의 활자처럼 쌓아두었다가 언제든 꺼내서 활판에 끼워놓을 수 있다는 식의 음 사고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기능화성의 논리는 기보법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근대적 음 사고가 산업사회를 예견하면서 도달한 필연적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양의 전통 음악가들은 악보에 기록될 수 있는 관념적인 음들과 실제 연주되는 음들 사이에 커다란 갭이 있다는 점을 의식하고 있었다. 실제 연주되는 음들은 즉흥적 선율을 토대로 하며, 사실상 기보될 수 없는 미묘한 장식음과 더불어 종종 음들과 장단 사이를 미끄러져 유희한다. 이 경우 악보는 선율적 윤곽에 대한 불완전한 스케치에 불과한 것으로 선율 기억을 위한 보조 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 판소리나 시조, 가곡과 같은 한국의 전통 성악이 지금도 구전심수(口傳心授)의 교육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다.

16세기 이동활판 인쇄술로 출판한 팔레스트리나의 미사곡 악보.

숫자저음 악보를 보던 바로크 시대에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서양 클래식의 경우 연주자가 악보에 지시된 음표의 기능에서 벗어난 즉흥적 연주를 하는 것은 사실상 허용되지 않는다. 기보문화와 악보는 작곡가의 섬세한 의도를 음악 작품에 관철시키고 다수 음악청중과의 세련된 음악적 소통을 가능케 한 서양 음악문화의 핵심적 요소임에 분명하지만, 한편으로 음악에 쓰이는 음들에 대한 사고를 제한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악보의 엄격한 규정성으로부터, 나아가 표준화된 화음들로부터도 좀 더 자유로울 수는 없을까? 이러한 물음은 우연성 음악이나 구체음악과 같은 20세기 전위 음악 탄생의 동기이기도 했지만, 서양 근대 음악에 역동성을 부여해 온 또 다른 보이지 않는 힘이기도 했다. 악보가 정교해질수록 악보 너머의 세계를 탐구하려는 음악가들의 충동이 늘 있어 왔기 때문이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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