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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27 19:43 수정 : 2017.04.27 20:22

마르틴 루터 가족의 음악 활동을 그린 독일의 화가 구스타프 슈팡겐베르크의 그림.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그림으로, 류트를 직접 연주하면서 찬송가를 반주하는 루터의 모습이 이채롭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세속화된 음악관과 19세기 서양의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5) 서양음악의 세속화

마르틴 루터 가족의 음악 활동을 그린 독일의 화가 구스타프 슈팡겐베르크의 그림. 19세기 후반에 그려진 그림으로, 류트를 직접 연주하면서 찬송가를 반주하는 루터의 모습이 이채롭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세속화된 음악관과 19세기 서양의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한반도 음악문화에서 서양음악과의 본격적 접촉은 19세기말 미국 선교사에 의한 개신교 찬송가의 유입에서 시작된다. 물론 18세기의 홍대용이나 박지원과 같은 실학자들이 청나라 방문을 통해서 서양음악을 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개인적 관심이나 호기심 충족의 차원에 머물렀다. 또한 심한 박해를 받으며 천주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가톨릭 성가가 단편적으로 소개되었으리라 추정하기도 하지만 악보도 남아 있지 않고 그 자취나 영향을 찾기가 힘들다. 1876년 강화도조약과 함께 기독교 선교활동이 합법화된 이후 1885년에 미국의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제물포 항구를 통해 한반도에 도착하면서 비로소 서양음악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이 소개한 찬송가는 개신교 교회의 종교음악으로서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불리게 된 ‘애국가’, ‘독립군가’와 같은 항일 저항가요는 모두 찬송가를 모델로 한 노래들이었다. 당시 신식교육 현장에서 열심히 배우고 가르친 ‘창가’라고 불린 노래들이 모두 찬송가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찬송가풍의 서양노래가 한반도에서 그토록 짧은 기간에 광범위하게 확산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년 전 서양에서 발생한 종교개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의 지도자였던 마르틴 루터가 열성적인 음악 애호가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중요한 점은 그가 ‘코랄’(chorale)이라고 하는 개신교 찬송가를 창시한 장본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서양음악은 루터의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달리 말하면, 종교개혁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5세기 동안의 서양음악사가 한반도에서는 1세기 남짓의 기간 동안 압축되어 재현되었다고도 하겠다.

♪ 사제의 노래에서 회중의 노래로

기존의 서양음악사 기술에서 루터의 종교개혁과 코랄은 과소평가되어 온 감이 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서양음악의 양식사적 전개 과정에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독일이라는, 당시로서는 음악적 변방에서 등장한 코랄은 화려했던 다성부 성악곡으로부터 양식적 퇴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민요에 기반을 둔, 소박한 ‘대중음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코랄에서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이라고 불리는 기존 선율을 활용한 일종의 ‘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관행이 자주 이루어져 예술적 창조성이나 독창성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일제강점기에 ‘애국가’ 가사를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선율에 맞추어 불렀던 것도 찬송가의 영향을 받은 일종의 ‘콘트라팍툼’이라 할 수 있다)

루터 코랄의 진정한 혁신은 음악 양식 그 자체보다는 음악적 실천의 측면에 있다. 가톨릭 교회의 예배에서 음악은 일반 회중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교회의 성가는 사제와 신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밀스러운 대화였다. 따라서 수도원에서 수도승들끼리 청중 없이 부르거나, 미사를 집전할 때도 전문적인 성가대원들만이 가창을 담당했다. 종교개혁 직전 교회의 다성음악은 난해함과 복잡함에서 정점에 치닫고 있었다. 기보법의 발전으로 복잡한 다성부 작곡이 가능해진 탓이기도 했다. 어지럽게 교차되는 여러 성부의 선율들에 더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 가사까지, 당시의 평민 회중들이 다성부 교회음악을 듣는 심정은 오늘날 연주회장에서 고도로 난해한 현대음악을 듣는 청중들의 심정에 비유할 만하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의미심장한 음악이라고 하니 그저 듣고 있어야 하는.

선교사에 의한 개신교 찬송가 서양
음악과 본격 접촉한 계기

루터, 개신교 찬송가 ‘코랄’ 창시 회중
소외하는 음악관습에 반기

교회 성가곡과 세속적 감성 만나
근대 국민국가 권력과도 연결돼

1517년 루터가 면죄부를 파는 가톨릭 사제들의 악행에 반기를 들면서 비텐베르크 성교회 정문에 95개조 논제를 써 붙였을 때, 그는 회중을 소외시키는 교회의 음악 관습에 대해서도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 곧 ‘사제의 도움 없이 신자 스스로 회개하고 신에게 기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로 신을 찬양할 수 있다’는 음악적 아이디어로 귀결되었다. 누구나 부를 수 있는 찬송가는 선율이 단순하고 배워 익히기 쉬운 것이어야 한다. 가사가 라틴어 아닌 자국어여야 함은 물론이다. 자연스레 민요와 같은 세속음악의 요소가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 류트 연주가이기도 했던 루터는 스스로 아마추어 음악가로 낮추어 일컬었지만 일정 수준의 음악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교개혁 시기에 창작된 여러 코랄 작품들 가운데 루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곡들이 있는데,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대표적이다. 이 곡은 유럽 전역에서 널리 불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칸타타를 비롯한 후대의 여러 음악작품 속에 주제 선율로 차용되기도 했다. 1830년에 “종교개혁”이라는 표제와 함께 발표한 멘델스존의 교향곡 5번 마지막 4악장에도 이 노래 선율이 주제로 쓰이는데, 루터 코랄의 명징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 플루트 독주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도입부 주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하면 이윽고 목관 파트의 악기들이 따뜻한 음색으로 이 선율을 감싸 안는다. 이렇게 여러 성부로 나뉘어 있으면서도 주선율이 분명하게 느껴지는(주선율 파트와 화성을 담당하는 반주 파트로 이분화될 수 있는) 음악적 짜임새를 ‘호모포니’(homophony)라고 하는데, 제각기 독립적인 성부들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폴리포니’(polyphony)와 구별된다.

♪ 반종교개혁과 세속음악

긴 지속음이나 장식적인 멜리스마(가사 한 음절로 여러 음들을 이어 부르는 것)로 이루어진 기존의 가톨릭 성가와 달리 루터의 코랄은 대체로 가사의 한 음절에 한 음씩만 할당되었다. 선율들도 음계를 밟는 순차적 진행이 많아서 부르거나 듣기에 쉽고 편했다. 루터는 세속적 삶 속에서 즐겁게 일하는 것 자체가 곧 선행이라고 설교했던 것처럼, 음악을 일상에서 즐겁게 부르는 일 그 자체가 신을 향한 찬양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루터의 혁신적 사고는 당시 유럽 사회 전반의 르네상스 운동과 세속화의 움직임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개신교 운동의 다양한 시도들이 유럽의 북부 지역에서 거침없이 확산되면서, 가톨릭계 내부에서도 자체 개혁의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이를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종교개혁에 ‘반대한다’기보다 그에 ‘대응한다’는 뜻에 가깝다)이라고 하는데, 음악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다. 반종교개혁을 상징하는 1545년에서 1563년까지의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미사 의례의 재정비와 함께 가톨릭 교회음악에 대한 토론도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교회 성가가 너무 복잡하고 난해했으며 가사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성찰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반 회중의 성가 참여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전히 허용될 수 없었다. 결국 전문 성가대를 통한 완성도 있는 성가곡과 ‘이해하기 쉬운 음악’에 대한 세속적 요구 사이의 음악적 절충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반종교개혁의 음악을 상징하는 작곡가로 팔레스트리나를 꼽을 수 있다. 팔레스트리나의 ‘교황 마르첼리 미사’(1567)를 들어보면 치밀한 폴리포니와 명징한 호모포니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인의 감성에 부합하는 대규모 미사곡은 팔레스트리나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이루어지던 르네상스 후기는 서양 사회 전반의 발견과 발명의 시대였다. 음악에서도 다양한 악기들이 발명되어 실험적인 합주들이 시도되곤 했다. 악보에 온전히 담기지 못했던 이 시기의 음악 관습들이 고음악(early music) 연구의 성과를 통해 최근 활발하게 재현되고 있는데, 류트의 스트러밍(현 전체를 리듬에 맞추어 훑어 연주하는 주법)과 타악기의 규칙적 리듬이 강조되는 이 시기의 즉흥적 음악 연주는 종종 오늘날의 대중음악에 가깝게 들린다. 르네상스 후기는 유럽 전역에서 새롭게 불어닥친 세속음악의 시대,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활발한 참여가 이루어진 대중음악의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이탈리아의 세속 성악곡 양식인 마드리갈은 다음 연재에서 다룰 오페라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종교개혁과 인쇄혁명의 연관관계가 자주 논의되어 왔다. 루터의 ‘만인사제설’은 라틴어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인쇄매체를 통한 대중적 확산이 없었다면 설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찬송가 악보의 대중적 보급이 없었다면 일반 회중의 활발한 음악예배 참여 역시 시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종교개혁과 코랄이 갖는 의미는 음악과 세속적 감성이 제도적 차원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작센 선제후의 물질적 지원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으며, 이는 근대 국민국가 권력과의 정치적 협력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20세기 초 한국의 찬송가가 ‘애국 창가’와 연결되었던 것도 이 점에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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