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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5.18 20:23 수정 : 2017.05.18 20:32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6) 오페라의 탄생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던 작곡가 륄리의 오페라 <알케스티스>가 1674년 베르사유 궁전의 야외 무대에서 초연되는 모습.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던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인의 극장 그 자체였고, 루이 14세는 그 무대 위의 스타였다. 루이 14세의 일거수일투족은 교양 있는 유럽인이 되기 위한 생활규범이 되어갔다. 음악 역시 이러한 선망의 궁정 생활을 장식하는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다.
“저 사람들은 (…) 내가 뭔가가 되어주길 바라.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놈인데.” 가수 자이언티가 올해 초에 발표한 노래의 후렴부 가사다. 이 노랫말은 한편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는 스타 연예인으로서 가수 자신이 느끼는 부담감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노랫말처럼 들린다. 대중은 인기 가수의 실제 모습이야 어떻든 멋진 존재, 즉 “뭔가가 되어주길” 바라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왜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도 없는 그가 멋진 사람이기를 바랄까?

이 의문을 풀어주는 실마리는 뜻밖에도 그다음 가사에 있다.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는 고백. 이 고백의 말을 듣고 실망하여 가수로부터 등을 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중이 노래 가사 속 주인공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가수가 멋진 존재이기를 바라는 것이나 그가 실은 초라한 존재라며 부끄러워하는 것은 모두 청중이 내밀하게 자신을 투사하여 느끼는 감정이다. 요컨대 가수는 단순히 ‘노래한다’기보다는 청중 속에 있을 법한 누군가를 ‘연기한다’. 이를 통해 공감(共感)을 연출한다.

♬ 세상은 극장

오늘날 노래하는 가수는 대부분 누군가를 연기하는 연극배우와 닮아 있다. 주류 대중음악에서 새로운 노래가 나올 때면 공들여 제작해 선보이는 뮤직비디오에서 이러한 면모는 잘 드러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오페라나 뮤지컬의 배우처럼 노래하며, 청중들 역시 배우의 연기를 보듯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대부분의 음악 양식들이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의 오페라, 혹은 그와 깊이 관련되는 ‘재현양식’(stile rappresentativo)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주인공의 목소리와 감정을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음악적 장치들, 예컨대 재현적 기능을 고려하여 비슷한 음색의 그룹별로 정비된 관현악 시스템, 명확한 가사 전달을 목표로 주선율과 반주로 이원화된 호모포니(homophony), 기쁨과 슬픔의 양극화된 감정을 전제로 음악적 수사법을 관철시키기 위한 장단조 화성과 조성 체계가 모두 오페라와 함께 발전했다. 서양음악의 ‘공통음악어법 시대’(common practice era)가 오페라 무대를 통해 개막된 것이다.

오페라와 관련하여 전제해 둘 것이 있다. 오페라와 닮아 보이는 음악극은 세계의 음악문화 어디에든 있다. 한국의 판소리는 물론,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도 모두 일종의 음악극이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서의 ‘극’(drama)과 사태의 객관적 묘사로서의 ‘재현’(representation)은 어느 정도 구분될 필요가 있다. 모든 극은 일정 부분 재현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많은 경우 비재현적 방식으로 연행될 수 있다. 가령 판소리 연행에서 흔히 나타나듯 소리꾼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거나, 반대로 관객이 추임새를 넣으며 연행에 개입할 경우 재현은 엄밀하게 이루어지기 어렵다. 서양 오페라 양식의 특이점은 처음부터 재현에 몰두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바그너에서 정점을 이루듯 음악의 재현적 기능을 확장하기 위해 놀랄 만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데에 있다. 그 성과는 20세기 이후 영화음악으로 이어진다.

오페라 양식이 17세기 무렵 바로크 시대에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때는 음악이 연극이고 싶어했던 시기다. 사실상 당시에는 유럽 사회 전체가 연극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나 프랑스의 코르네유, 라신, 몰리에르와 같은 훌륭한 극작가와 배우들이 활약하던 시대였다는 뜻만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의 소용돌이와 함께 서양인들이 차차 신 중심의 중세 질서에서 벗어나면서, 세속적 삶 그 자체가 연극의 무대처럼 조망되기 시작했다. 바로크 시기 내내 ‘세상은 극장’(theatrum mundi)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성직자를 매개로 불멸의 사후세계를 막연하게 상상하기보다는, 유한하고 덧없지만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관찰하고 싶어했다. 이제 남는 문제는 누가 ‘세상이라는 극장’의 무대 위 주인공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관찰하고 싶어했다. 이제 남는 문제는 누가 ‘세상이라는 극장’의 무대 위 주인공이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세상이라는 극장’의 무대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선택권의 향방과 관련이 있다.

바로크 시대를 상징하는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의 ‘태양왕’ 루이 14세가 한동안 그 무대를 장악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던 베르사유 궁전은 유럽인의 극장 그 자체였고, 루이 14세는 그 무대 위의 스타였다. 영화 <왕의 춤>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루이 14세의 충직한 하인이었던 음악가 륄리는 왕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현하는 발레 음악을 작곡하고 이후 프랑스 오페라 양식의 전범이 되는 오페라 작품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무대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일거수일투족은 교양 있는 유럽인이 되기 위한 생활규범이 되어갔다. 음악 역시 이러한 선망의 궁정 생활을 장식하는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영리한 군주가 주도면밀하게 간파한 사실이지만, 이제 막 교회 권력을 대체하고 있었던 불안정한 세속 권력이 대중 위에 군림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 방법이란 스스로 대중의 ‘아이돌’이 되는 것이었다.

1609년에 출판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오르페오> 악보집 표지.

♬ 공감의 발견

근대적 대의 민주주의(재현적 민주주의, representative democracy) 체제는 ‘세상이라는 극장’의 무대에 누구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선택권의 향방과 관련이 있다. 서양의 바로크 시대는 여러모로 근대를 향한 이행기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 시기에 무려 반세기 이상 장기 집권했던 루이 14세는 궁정 무대를 통한 절대군주의 우상화 작업이 자신의 사후 1세기도 채 유지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지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는 초기 오페라 실험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그 무대를 자신의 과시 수단으로 활용하던 귀족들에게도 적용된다.

16세기말 피렌체의 백작 바르디의 후원을 받았던 음악가, 시인, 지식인 그룹에서 오페라를 창안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카메라타’라고 불렸던 이 모임은 고대 그리스 문화를 전범으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문예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크고 작은 아카데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의 목표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 문화를 되살리자는 것이었고, 그리스 연극이 음악과 분리되지 않은 종합예술이었기 때문에 음악극의 형태로 실험하려 했다. 극의 소재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져와서 첫 작품은 <다프네>였고, 두 번째 작품은 <에우리디체>였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사실상 워크숍에 불과했고, 1607년 이미 마드리갈(이탈리아의 다성부 세속 성악 양식)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던 몬테베르디가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곁들인 <오르페오>를 선보이고 나서야 오페라 양식의 잠재력은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이야기는 이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오페라의 단골 소재가 되었는데, 이유가 있어 보인다. 두 연인 사이의 비극적 스토리가 자아내는 센티멘털리즘도 그렇거니와, 오르페오라는 주인공은 음악가의 입장에서도, 대본을 쓰는 시인의 입장에서도, 나아가 고귀한 신분을 과시하려는 물주인 귀족의 입장에서도 각각 주인공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 오페라 무대의 명실상부한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귀족일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오페라 제작은 큰돈이 드는 일이었다. 당시에 오페라를 지원했던 귀족들은 베르사유 궁전의 루이 14세처럼 화려한 오페라 공연을 통해 일반 평민들은 범접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세계를 과시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아마도 귀족들이 예기치 못했을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페라의 인기가 중간계층과 평민들에게까지 파고들면서 베네치아에 상업적 오페라 하우스가 세워진 것이다. 오페라가 시작된 지 한 세대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1637년의 일이다. 점진적인 변화였지만 이후에 펼쳐졌던 상황은 짐작할 만하다. 오페라 하우스의 대중 관객들은 차츰 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허장성세의 오페라 소재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귀족들이 선호하는 ‘서정 비극’과 ‘오페라 세리아’(진지한 오페라라는 뜻) 대신에 평민들도 비중 있게 등장하는 희극 오페라인 ‘오페라 부파’를 요구했다. 결국 오페라 하우스가 생긴 지 1세기가 못 되어,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 작품 한 편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원래 오페라 세리아의 막간극으로 연출되었던 페르골레시의 <마님이 된 하녀>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이 프랑스에 진출했을 때는 루소와 같은 계몽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이른바 ‘부퐁 논쟁’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18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부퐁 논쟁’의 외양은 오페라의 양식 논쟁처럼 보였지만, 실은 오페라 무대가 재현하는 주인공이 누구여야 하는가에 대한 정치적 논쟁의 성격을 띠었다. 물론 귀족과 평민, 귀족과 시민계급 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로 오페라의 역사를 단순화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오페라의 걸작들은 고귀하고 진지한 것과 통속적이고 일상적인 것 사이의 치열한 타협과 절충 속에서 보편적 공감을 얻어 왔다. 오페라 탄생의 주역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히 음악과 일상적 언어 사이의 관계를 치열하게 탐구했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서 음악이 얼마나 언어와 닮아졌냐면, 이제 악기만으로도 언어적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다음 연재에서 다룰 주제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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