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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01 19:31 수정 : 2017.06.13 23:09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7) 기악음악의 독립

‘음형이론’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자신의 저서 <보편 음악론>(Musurgia Universalis)(1650)에서 제시한 그림. 나이팅게일을 비롯한 여러 새들의 소리를 악보에 옮겨 놓았다. 음악이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모두 재현할 수 있다는 바로크적 음 사고의 일단을 보여준다.
17세기 무렵 시작되는 서양음악사의 바로크 시대는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던 ‘공통음악어법’이 성립되는 새롭고도 중요한 시기였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다양성과 혼란으로 가득 찬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음악사의 20세기(3세기 만에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대’로 여겨졌던)를 쇤베르크의 모더니즘 음악만으로 설명한다거나 블루스와 재즈음악으로만 서술한다면 왜곡일 수밖에 없듯이, 17세기의 서양음악 또한 대표적인 작곡가나 두드러진 몇 가지 음악양식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몇 가지 굵직한 흐름만 짚어 봐도 이렇다. 모노디(화음 반주의 단선율 노래)로 단순화된 세속적 음악양식들이 다성부 성가 중심의 전통적 음악양식에 도전하고 있었고, 다양한 악기들이 제작되어 새로운 성악 반주와 기악 합주에 활용되면서 표준화된 관현악 편성과 조율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다. 세속의 정치권력과 귀족 계층은 궁정을 배경으로 한껏 화려해진 음악을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거나 신분 과시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으로, 상업적으로 출판된 악보를 통해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저변이 크게 확대되고 있었으며, 오페라 극장에서는 스타 가수들이 관객들을 열광시키고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서양음악은 한편으로 과학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음악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모색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다른 제도와 계층, 그리고 상이한 연주 관습들 사이에서 소통과 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암묵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것은 세력권을 넓히고자 하는 교회나 궁정의 정치적 지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으며, 상업적 오페라 상연과 악보 출판에서 비롯된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보편적 언어(logos)를 찾는 것은 고대와 중세에도 지속적으로 수행된 이성적 작업이었다. 바로크 정신이 보여준 새로움은 보편 언어의 가능성을 감성적(정서적) 차원과 긴밀히 연관시켜 탐구했다는 데에 있다. 그 출발은 오페라의 극화된 성악 언어였지만, 오래지 않아 좀 더 추상화된 기악 언어로 옮겨갔다.

♭ 표준어로서의 음악 언어

음악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거나 전달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전통민요 ‘새타령’에서 새소리를 흉내내는 것처럼 객관적인 자연 모방이 있을 수 있지만 사실상 제한적이다. 선율이나 음조, 리듬 패턴과 같은 것은 일정한 지역적 관습에 좌우되기 쉬워 객관성과 보편성을 얻기 어렵다. 음악은 언어이긴 하되, 지역적 방언(사투리)의 성격을 갖는 음조 언어이기 때문이다. 음악이 객관화된 공통언어가 된다는 것은 방언으로서의 성격을 포기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표준어’로서의 기능을 하겠다는 뜻이다.

오페라가 탄생하기 전부터 16세기의 세속 음악가들, 특히 마드리갈(이탈리아의 다성부 세속 성악 양식) 작곡가들은 ‘음 그리기’(tone painting) 기법을 쓰곤 했다. 예컨대 노랫말에 “내려간다”는 구절이 있으면 하행 음계를 쓰고, “함께”라는 단어가 있으면 다성부로, “홀로”라는 단어는 한 성부로 부르게 하는 식이었다. 오페라 탄생 이후 이러한 시도는 꽤나 집요해져서 상당히 체계적인 음형(音形)이론으로 발전했다. 특정 음형이 특정한 상황이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이론가와 작곡가 들은 수백 가지의 음형을 객관적인 상황이나 감정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일람표를 만들어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일종의 음악적 표준어 문법을 만들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런 시도가 실제 효과가 있었을까 의심스럽겠지만, 마드리갈이나 오페라와 같은 극적 음악양식에서 반복 활용될 경우 상당히 큰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예컨대 음형이론에 따르면 높은 도약 음정은 ‘기쁨’을 표현하고 점진적으로 하강하는 음들은 ‘슬픔’을 나타낸다. 실제로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님프의 라멘토>(요정의 탄식, 1638)를 들어보면 저음부에서 하강하는 네 음(라-솔-파-미)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음형이 슬픔을 재현한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는지 당시에 수많은 슬픔의 노래가 이와 동일한 지속저음 음형과 함께 불렸다. 이제 가사 없이 악기 소리만 들어도 그 슬픔이 전달될 정도였다. 바이올린 독주곡인 비탈리의 <샤콘>에서 바로 이 음형의 지속저음 반주가 반복되는데, 10여년 전 국내 음반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카피로 이 곡을 소개했던 것을 보면 이 음형이 전달하는 슬픔이 17세기의 관습에 머물지 않고 현재까지도 보편성을 갖는 모양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의 초상화.
엄밀히 말하면, 하강하는 지속저음 반주의 ‘음형’ 그 자체가 슬픔을 표현한다는 것은 트릭에 가깝다. 저음부 주제선율이 하강할 때 상성부의 변주선율과 빈번하게 불협화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때의 불협화음이 청중으로 하여금 ‘슬픔’이라는 감정을 환기시키는 원인이 된다. 제수알도나 몬테베르디와 같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작곡가들은 이미 16세기부터 주인공의 고통이나 슬픔이 표현되는 가사의 대목에서 의도적으로 불안한 반음계 진행과 불협화음을 썼다. 17세기에 ‘제2작법’(seconda prattica)으로 불린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당시로서는 파격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중세까지 음악은 신이 창조한 자연과 우주의 조화를 묘사하는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음악가에게 불협화음은 세심하게 피해야 할 금지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불협화음을 쓴다는 것은 말하자면 신성 모독이었다.

불협화음의 발견은 곧 협화음의 발견과 맞물렸다. 바로크 이전까지 음들의 수직적 질서와 관련한 협화음의 조건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협화음을 ‘의도적으로’ 쓴다는 것 역시 사실상 어려웠다. 서양의 근대 화성이론(조성적 화성 내지는 기능화성적 조성 이론)은 16세기 베네치아의 이론가 차를리노에서 출발하여, 18세기 초반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이론가였던 장 필리프 라모의 화성론(특히 1722년에 발표한 <자연의 원리로 환원한 화성에 관한 논서>)을 통해 1차적으로 정립된다. 수직적 협화음의 원리로서 화성론의 정립은 역설적이지만 불협화음의 수사학(rhetoric)적 활용 가능성을 넓혀 놓았다. 음악은 이제 갈등과 해결(불협화-협화)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활용하여 ‘기-승-전-결’의 음악적 드라마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 기악의 해방

한국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클래식음악으로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라모의 화성론이 출판되고 3년 뒤에 발표되었다)를 들어보면 음악을 보편적 언어로 삼고자 했던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일정한 성과를 느낄 수 있다. 쳄발로를 제외하면 바이올린족의 현악기로만 이루어진 소박한 실내악 앙상블로 사계절의 자연을 남김없이 묘사하겠다는 저 자신만만함은 같은 시기 과학혁명을 이룬 서양인들의 자부심과 겹쳐 보인다. 이 음악에서 정말 새소리와 시냇물 소리, 천둥소리가 재현되고 있으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환희와 천둥소리에 느끼는 두려움, 겨울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겨움이 느껴지는가? 악보에 소네트 시구를 적어 상황 묘사에 대해 힌트를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작곡가 자신도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하는 듯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악기 소리만으로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언어적 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바야흐로 서양음악사의 공통음악어법 시대가 개시된 것이다.

바로크 시대에 기악음악은 두 방향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첫째는 가사라는 언어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둘째는 춤과 같은 몸짓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기악의 해방이 각각 언어와 춤(몸짓)을 음악과 더욱 긴밀하게 연관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바로크 협주곡은 주인공의 목소리가 솔로 악기로 대체된 기악적 오페라이며, 바로크 모음곡은 몸짓과 제스처를 내재한 기악적 춤이다. 도식적이지만, 전자가 베네치아의 오페라 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 양식이라면, 후자는 베르사유 궁전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양식이라 할 만하다. 말하자면, 기악음악 속에서도 이탈리아는 노래를 추구하고 프랑스는 춤과 몸짓을 추구했다. 이러한 민족적 내지는 국가적 특질은 공통음악어법이 추구되는 한편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17세기 초 종교전쟁에 휩싸였던 독일의 음악이다. 또 한 번 도식화를 시도하자면, 코랄을 통해 음악의 개인주의적 가치를 지지했던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독일적 기악음악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민중주의적 지향과 신학적 내면으로의 침잠이 역설적 조화를 이룬다고 할까. 이 점은 개신교 정신으로 가득 찬 바흐의 기악음악에서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베토벤으로 대표되는 고전과 낭만주의 시대 독일음악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음악이 인간의 언어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종교가 되고자 했던.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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