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8. 교향곡과 시민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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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공공연주회 가운데 하나였던 ‘콜레기움 무지쿰’ 야외공연 모습. 독일의 대학 도시들에서 학생들과 전문 음악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연주회로 열렸다. 입장료를 받는 상업 연주회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17세기 이전부터 이루어졌던 공공연주회의 초기 형태 가운데 하나였다. 라이프치히의 바흐도 이 연주회를 위한 곡을 썼다. 그림은 1740년께 독일의 예나에서 행해진 공연 모습. 횃불로 불을 밝힌 야외 공연의 풍경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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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주회는 음악 감상에 대한 열의가 있고 여흥을 위한 시간과 돈은 있지만 교향악단을 고용할 만큼의 재력은 없었던 신흥 중산층 시민계급들이 교향곡과 같은 음악을 듣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절충안이었다. 궁정의 후원 방식이 좋든 싫든 왕과 귀족의 음악적 취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면, 공공음악회의 자발적 시민 후원 방식은 불안정하고 일회적인 대신 음악가의 자율성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뜻밖의 사실로 여겨지겠지만, 16세기 이전까지 한반도 음악의 관현악은 규모 면에서 서양보다 앞서 있었다. 12세기 고려시대에 이미 중국으로부터 궁중음악 합주를 위한 대규모 관현악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조선 개국 이후에는 한반도 전통 악기들을 보강하여 체계적인 궁중 관현악단 조직을 갖추었다. 15세기 조선 성종대의 종묘제례악 연행을 예로 들면, 29종이 넘는 악기에 동원되는 연주자들만 무려 107명이었다고 한다. 궁중 제사 음악이라고 도외시할 일이 아니다. 바흐의 교회음악도 의식용 음악이기는 마찬가지다. 조선의 궁궐에서 제사 음악만 연행한 것도 아니며, 세속음악이 포함된 크고 작은 연회 음악이 있었고 임금의 행차 때 쓰는 음악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관현악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일정 수준 이상의 음률이론과 합리적 관료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그토록 많은 수의 악기와 연주자를 조화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서양의 경우 중세까지 음악 제도의 중심 역할을 하던 가톨릭교회에서 악기 사용을 기피했기 때문에(무반주 다성부 성악곡을 가리키는 ‘아 카펠라’가 ‘교회당 풍으로’라는 뜻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대규모 관현악 합주 문화가 발달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를 다룬 지난 연재 글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7세기 이후 오페라가 탄생하고, 무대예술과 관현악단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절대군주의 호화로운 궁정 문화가 등장하면서 상황은 점차 바뀌게 된다. 애꿎게도 바로 이 시기에 조선은 양란(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궁중음악이 오히려 쇠퇴일로를 걷게 된다. 관현악단 규모로만 단순 비교해 본다면, 17세기를 축으로 동서양음악의 역전이 일어나는 셈이다. 과학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으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사회 변화가 서양의 관현악 문화를 역동적으로 키웠다. 서양음악사의 고전시기(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는 바로크에서 이어지는 오페라와 기악음악의 발전에 맞물려서 관현악이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시기다.
ƒ 소나타와 교향곡
바로크 시기 오페라의 탄생과 발전은 서양음악에서 공식적으로 관현악단의 존재감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몬테베르디가 자신의 오페라에서 사용한 대규모 관현악단이 그 서막을 열었다. 몬테베르디가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와 같은 위대한 바이올린 제작자를 배출한 ‘악기의 도시’ 크레모나 출신이었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오페라의 발전과 함께 서양의 악기들은 다채로우면서도 통일성 있는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소리 내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소나레’(sonare)에서 파생한 ‘소나타’(sonata)라는 용어가 바로크 시기의 여러 기악음악을 가리키는 데에 쓰였다.
여러 악장을 갖춘 기악곡에 대해서 두루 쓰였던 ‘소나타’라는 명칭은 이후 고전시대에 좀더 엄격하게 쓰인다. 소나타는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기악 드라마’와 같았는데, 기능화성 체계가 정립되면서 여러 조(keys)들 사이의 어울리는 정도(협화성)를 기준으로 객관적 위계관계를 설정할 수 있게 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예를 들면, C장조로 시작한 음악이 G장조라는 이질적 음조를 만나 ‘갈등’을 겪다가 다시 원래의 C장조로 되돌아옴으로써 갈등이 ‘해결’되는 식이었다. 기악 형식으로서 소나타의 발전은 ‘갈등’ 부분에서 좀더 흥미로운 선율과 전조(조 변화)를 이용해서 대조와 분위기 변화를 이끌어낸 뒤 다시 매끄러운 전조를 통해 원래의 주조(主調, home key)로 되돌아오는 전조 기술의 발전과 관련된다. 소나타는 보통 3악장이나 4악장으로 구성되어 악장 간의 분위기 변화도 드라마 전개에 활용된다(모차르트와 베토벤은 전조 기술을 활용한 음악적 드라마의 대가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연재 글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어볼 것이다).
독주악기 소나타는 ‘바이올린 소나타’, ‘첼로 소나타’, ‘피아노 소나타’와 같은 식으로 악곡 명칭을 부여했는데, 해당 악기가 관현악일 때는 ‘관현악 소나타’ 대신에 다른 이름을 썼다. 바로 ‘교향곡’(symphony)이다. 소나타가 ‘기악 드라마’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면 ‘관현악 소나타’로서의 ‘교향곡’은 말하자면 ‘블록버스터 드라마’다. 교향곡은 원래 ‘오페라 서곡’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오페라에 등장할 인물들이 추상화된 주제선율의 형태로 서곡에 제시되곤 했다. 오페라 서곡은 말하자면 오페라의 ‘기악적 예고편’이라 할 만했는데, 이는 교향곡의 드라마적 성격으로 이어졌다. 서양에서 교향곡의 폭발적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가 소설의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와 맞물리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ƒ 공공음악회와 ‘대중’의 탄생
교향곡의 어원이 되는 ‘신포니아’(sinfonia)는 ‘여러 소리들의 조화’를 뜻한다. 클래식 연주회장에서 접하게 되는 정형화된 악기 편성의 서양 관현악단을 ‘교향곡을 연주하는 악단’이라는 의미에서 ‘교향악단’(symphony orchestra)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교향곡은 단순한 악곡 명칭을 넘어서 ‘조화로운 소리’의 이상적 모델을 표상하는 것이다.
이러한 서양의 교향악단은 서두에서 언급한 조선의 왕실 악단(궁내 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던 ‘장악원’ 소속 악단)과 공통점이 의외로 많다.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는바 연주자들이 단체복을 입는 관습만 해도 그렇다. 교향악단 연주자들의 단체 복장은 이들이 궁정 소속의 악사 조직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사실상 일정 수준 이상의 재력과 권력을 가진 절대군주가 아니고서야 수십 명에서 심지어 수백 명을 헤아리는 연주자가 동원되는 관현악단을 유지할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교향곡과 교향악단은 사실상 17세기와 18세기 서양의 궁정사회가 남긴 유산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왕실의 악단은 밤이고 낮이고 궁중 연회장에 모인 왕족들과 귀빈들을 위한 음악을 제공해야 했다. 교향곡 역시 궁정에서 연주되었던(예컨대 요한 슈타미츠라는 유능한 악장의 지도 아래 일사불란한 연주 솜씨로 명성을 날리던 만하임 궁정 악단의) 여러 축전용 음악과 오페라 서곡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서양의 교향악단이 조선의 왕실 악단과 다른 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좇다 보면 서양 시민계급의 부상과 ‘시민혁명’을 만나게 된다. 물음에 대한 답부터 제시해보자. 서양의 교향악단은 적어도 18세기 이후 궁정의 벽을 넘어서 왕이나 귀족만이 아닌 일반 시민을 청중으로 의식하기 시작한 반면, 조선의 왕실 악단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의 ‘여민락’(與民樂)을 주요 연주곡목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18세기까지 서양의 음악가들이 가장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은 물론 궁정이었다. 음악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지위 역시 궁정 악장이었는데, 조선의 궁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궁정에서도 악인(樂人)들의 신분은 낮았고 경제적 처우도 전반적으로 열악했다. 재정 악화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궁정의 경우 악단 연주자들에게 제대로 보수를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 시민계급이 부상하는 반면 절대주의에 균열이 이루어져가던 무렵부터 흥미로운 음악 이벤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을 위한 공공음악회(public concert)다. 음악가들은 궁정의 음악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서 부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선도한 영국이 공공음악회의 발전에서도 앞서가서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공공연주회’의 성격을 띤 공연들이 이루어졌다. 영국인으로 귀화한 헨델이 1749년 복스홀 플레저가든(놀이공원)에서 <왕궁의 불꽃놀이> 연주를 위한 최종 리허설을 공공연주회 형식으로 했던 사실은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소액의 입장료를 내고 모여든 관중이 무려 1만2천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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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영국에서 다양한 공공연주회가 이루어지던 런던 외곽의 라넬라그 플레저가든. 오른편 무대에서 관현악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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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연주회는 플레저가든과 같은 야외 공간이나 상류층의 사랑방(살롱)과 같은 다양한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궁정 행사가 없을 때면 작곡가 스스로 기획한 시민을 위한 예약 연주회를 위해 궁정 극장을 대관할 수도 있었다. 공공연주회는 음악 감상에 대한 열의가 있고 여흥을 위한 시간과 돈은 있지만 교향악단을 고용할 만큼의 재력은 없었던 신흥 중산층 시민계급들이 교향곡과 같은 음악을 듣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문화적 절충안이었다. 음악가로서는 궁정의 후원 방식이 더 안정되고 지속적인 반면 좋든 싫든 왕과 귀족의 음악적 취향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면, 공공음악회의 자발적 시민 후원 방식은 불안정하고 일회적인 대신 음악가의 자율성과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작곡가들은 시민 후원 방식에 자존심과 기대를 걸었다. 그에 따라 이들의 음악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왕이 아닌 시민, 즉 대중의 취미를 의식하며 곡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교향곡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술했다고 해서 고전주의 시대에 오페라는 숨죽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오페라에 대해 서술한 연재 글에서 이미 밝혀둔 바 있듯이 18세기 중반 파리는 이탈리아에서 수입된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의 인기로 들끓었다. 유럽의 시민들은 더 이상 왕이나 신화적 영웅이 아닌 평범한 시민이 주인공인 음악 드라마를 원했다. 서양음악사의 시민혁명은 그렇게 다양한 자리에서 ‘소리 나고’ 있었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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