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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 모차르트 나이 열 살 때 프랑스 파리의 콩티 공작의 살롱에서 벌어진 음악회 풍경. 그림의 왼편 아래쪽 건반 앞에 앉아 있는 어린 모차르트가 보인다. 그의 유년 시절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한 끝없는 여행으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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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9) 모차르트와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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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6년 모차르트 나이 열 살 때 프랑스 파리의 콩티 공작의 살롱에서 벌어진 음악회 풍경. 그림의 왼편 아래쪽 건반 앞에 앉아 있는 어린 모차르트가 보인다. 그의 유년 시절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한 끝없는 여행으로 점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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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구체제에 머문 채 체념하기엔 신체제가 가까워 보이고, 신체제에 맞추어 살기에는 구체제의 영향이 컸던 현실 속에 살았다. 그래도 그는 잘츠부르크에서의 ‘궁정음악가’ 직분을 마다하고 ‘자유예술가’의 꿈을 안고 빈으로 떠났다. 모차르트 음악의 천재성은 더 많은 시민 대중과의 ‘공감’에서 드러난다.
사회학자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1939)을 통해 분석했듯이 17~18세기 서양의 절대주의 궁정사회와 시민혁명 이후의 근대 국민국가 사이에는 단절만큼이나 연속성도 많다. 그에 따르면 절대왕정에서 서양인의 공적·사적 생활규범이라 할 만한 것이 창출되었으며, 이는 시민적 도덕의 창출로 이어졌다. 자유·평등·형제애와 같은 계몽주의적 사고조차 시민계급의 지식인들이 배제되지 않았던 궁정사회에서 싹텄으며 그 결과 ‘계몽군주’라는 모순적 존재를 낳기도 했다. 서양음악사는 엘리아스가 제시하는 이러한 ‘문명화’(civilization, 이 단어에는 ‘문민화’ 내지 ‘시민화’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의 관점에서 볼 때 좀더 매끄럽게 읽힌다. 오페라와 협주곡, 소나타와 같은 근대적 음악양식의 발전 과정에서 궁정사회와 시민사회(근대 국민국가)는 자주 모순 없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민혁명 이후의 ‘신체제’에서 새롭게 정치적 주체로 부상한 중산층 시민계급에게 ‘구체제’(앙시앵레짐)의 궁정음악은 폐기하거나 청산해야 할 것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대중과 함께 나누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궁정의 귀족들이 느끼는 음악적 즐거움과 평범한 시민들이 느끼는 즐거움이 본질상 서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사실상 혁명적인 것이 아닐까? 계몽주의와 시민혁명기의 서양음악, 특히 모차르트의 음악이 시대정신을 구현한다면 무엇보다 이 점에서일 것이다.
♪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고전시대 음악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양음악사상 가장 폭넓은 청중을 가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사실상 누구라도 듣고 좋아할 만한 가장 ‘대중적인’ 음악이다. ‘1차 빈악파’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 세 작곡가의 음악은 이 점에서 일종의 가족유사성이 있지만 차이도 적지 않다. 그것은 작곡가 개인의 역량 차이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 시민혁명(1789)을 기점으로 구체제에서 신체제로 이행하던 서양사회의 역동적 변화 과정에서 그들 각자의 생애주기가 어디쯤 위치했는가가 못지않게 중요하다. 당시 음악가는 ‘시민계급’에 해당했고, 무엇보다 신체제는 음악가의 신분상승이라는 사회적 효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이든(1732~1809)은, 일흔 살 넘게 비교적 장수한 덕분에 생애 말년에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고 빈에서 자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상연할 때는 최상위 귀빈 대접을 받는 등 신체제의 호사를 맛볼 수 있었지만, 그의 생애 대부분은 구체제(에스테르하지 궁정의 충직한 음악가 하인)에 속했다. 반면 베토벤(1770~1827)의 경우는 귀족들의 ‘갑질’로 인해 울분에 찬 청년기를 보냈지만 중년기부터 일찌감치 신체제 예술가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모차르트(1756~1791)다. 그의 생애주기는 구체제에 머문 채 체념하기에는 신체제가 너무 가까워 보였고 신체제에 맞추어 살기에는 구체제의 영향이 아직도 컸던 어중간한 시기에 걸쳐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으로 대표되는 18세기 중후반 고전주의 음악의 보편적(대중적) 감성은 그 시기 음악가들의 국제적 교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평생 독일 중부에 머물러 살았지만 그의 아들들, 특히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18세기 후반 이탈리아인으로 귀화하여 ‘밀라노 바흐’로 불리다가 영국에 이주한 이후에는 ‘런던 바흐’로도 불렸을 만큼 국제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런던에서 어린 모차르트를 만나서 여러가지 음악적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음악인들은 국제적으로 종횡무진하고 있었고, 설사 면대면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출판되거나 필사된 악보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역마차 등 교통수단 발달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기보법의 표준화(나아가 악기 조율의 표준화)와 ‘공통음악어법’의 공유는 음악적 국제 교류를 활성화한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모차르트는 18세기의 국제적 음악 교류에 있어서도 단연 독보적이고 예외적인 성격을 보인다. 그의 유년 시절은 사실상 여행에서 시작하여 여행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디(CD)나 유튜브와 같은 음악 매체가 전무했던 당시에, 특히 유년 시절부터 그토록 다양한 지역의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음악인은 극소수였을 것이다. 더구나 체계적인 교수법을 갖춘 유능한 음악교사인 아버지 레오폴트가 내내 동행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음악을 단순히 풍부하고 체계적인 영재 교육의 성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성인이 된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구체제의 ‘궁정음악가’로서 직분에 만족했다면 모차르트는 오늘날과 같이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1781년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면서까지 ‘자유예술가’의 꿈을 안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으로 갈 수 있었던 비범한 용기야말로 모차르트가 발휘한 천재성의 요체다. 모차르트의 걸작들 대부분은 빈 이후의 시기에 탄생했다.
물질적 토대에 있어서 신체제는 지난 연재에서 다루었던 ‘공공음악회’의 활성화와 아마추어 음악가들을 위한 악보 출판의 확대 등 중산층 시민계급을 대상으로 한 음악시장의 확장 과정과 관련이 깊다. 음악가에게 신체제란 궁정에서와 같이 모멸감을 대가로 치르지 않고도 청중을 만날 수 있는, 말하자면 ‘자유시장’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후원체제였다. 물론 ‘자유시장’은 변덕스러울 뿐만 아니라 사실상 기만적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시장에 대한 인본주의적 신뢰가 있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1776)을 써서 공정하고도 자유로운 시장의 가치를 설득력 있게 전파했던 때가 모차르트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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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출간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모차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시장에 대해 인본주의적 신뢰가 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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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와 공감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물론 그의 불가사의하리만큼 예민한 청력과 타고난 음악적 자질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의 음악이 보여주는 대중성은 그의 천재성만으로 온전히 해석될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애덤 스미스가 ‘공감’(共感, sympathy)이라고 말했던, 공익과 사익을 조화시킬 수 있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 사실상 신분과 계급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장’의 횡포에 시달리는 현대인에게는 잘 안 와닿겠지만 자본주의 초기의 시장은 이러한 계몽주의적 신념의 모체였다. 사회학자 지멜이 지적했듯 자본주의적 교환가치, 즉 “돈과 더불어 직접적인 상호 이해의 토대가 마련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행위 규정들이 제정되었으며, 이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것에 대한 표상이 성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고전주의 음악 일반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모차르트의 협주곡들은 사적 영역으로서의 개인(솔로 악기)과 공적 영역으로서의 사회(관현악)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려 깊은 대화와 합의를 표상한다. 그의 소나타와 교향곡들 또한 마찬가지지만 솔로 선율이 깊은 개인적 감정으로 침잠하는 경우라 해도 전체 합주와의 따뜻한 유대의 끈을 놓지 않는다. <피가로의 결혼> 등을 통해 서로 다른 신분과 계급 사이의 대화를 종종 도전적으로 그려낸 오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돈 조반니>에서 상층 귀족에서 중간층 시민계급, 나아가 농민계급까지 등장할 때, 그들 각각을 표상하는 춤곡들(미뉴에트와 알망드, 그리고 콩트르당스까지)은 교차되고 뒤섞이며 끝내 조화를 이룬다. 현실은 아직 그렇지 못할지언정 음악은 이들이 한목소리로 어울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 해에 남긴 걸작 <마술피리>에서 이 점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오늘날의 ‘뮤지컬’에 해당하는 대중적인 ‘징슈필’(Singspiel) 양식을 택했지만, 특정한 계급적 취향에 결탁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1막의 피날레 부분에서 파파게노가 부르는 노래의 마지막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우정으로 조화(Harmonie)를 이룰 때에만 근심이 줄어드네. 이런 공감(Sympathie)이 없다면, 땅 위의 행복은 없다네.”
‘계몽’(啓蒙, enlightenment)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많은 경우 ‘훈계조’를 뜻하는 말이 돼버렸지만,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가 1784년에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제시한 답변은 달랐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신의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용기 있게 지성(오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계몽을 위해서는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칸트는 마치 동시대의 작곡가 모차르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칸트가 계몽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모차르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의지하던 “정신의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주위의 반대도 무릅쓰고 “용기 있게 지성을 발휘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의 음악계로 나아갔다. 다양한 시민 청중을 대상으로 ‘공감’을 나누는 것,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서였다. 어쩌면 18세기보다 더 극심한 (또 다른 구체제로부터 신체제로의)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는 21세기의 음악가들이 모차르트를 닮고자 할 때 유념해야 할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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