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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7.13 19:53 수정 : 2017.07.13 20:20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0) 베토벤과 고전음악

지난 7일 오후(현지시각) 독일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홀에서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정상들이 참석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감상했다. 청와대 제공

1791년에 빈에서 죽은 모차르트가 생전에 바랐지만 온전히 영위하지 못했던 ‘자유예술가’로서의 삶을 1792년에 빈으로 이주해 온 청년 베토벤은 성공적으로 실현해 갔다. 베토벤이 일생에 걸쳐 귀족의 후원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귀족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구체제’에 기우는 보수적 예술가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오늘날과 같이 예술 기획사나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도 않았고 홍보 수단이 될 만한 미디어조차 활성화되지 못한 당시에 귀족 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위한 필수 요건에 해당했다. 베토벤이 귀족과 맺은 관계는 구체제의 궁정음악가들처럼 주문과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피고용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었다. 종종 그 반대에 가까운 양상이 나타났는데, 귀족들은 베토벤과의 사적인 친분 관계나 그의 음악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 자유예술가의 탄생

베토벤은 귀족들에게 작품을 헌정할 때 종종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를 보이곤 했다(물론 헌정료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사심 없는 인맥 형성을 통해 실제로는 더 큰 이익을 도모하는 처세술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존경받는 예술가와 귀족 후원자 사이의 전례 없이 대등한 관계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베토벤이 빈에서 활동하던 당시 음악애호가 귀족들은 유명 음악가들의 예약연주회와 공공연주회(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되는) 개최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매니저이기도 했고, 비싼 좌석 티켓을 대량 구입해주는 ‘우수 고객’이기도 했다. 이들은 음악가들과 시민들의 음악문화를 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메세나’에 합당한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귀족들과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중산층 시민들은 음악 레슨을 통해 음악가들의 부수입을 올려주기도 했다. 레슨이 두둑한 수입원이라는 점에서 한국 클래식계의 오랜 관행과 닮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베토벤 시대의 레슨은 대부분 순수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었지 ‘명문대 입시’와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았다. 사적으로 고용된 (하인으로서의) 음악인들이 사라져가고 있던 당시에, 그리고 한 세기 후에나 보급될 축음기가 없었던 시대에, 아마추어로서 음악을 배우는 것은 사적인 공간에서 명곡을 감상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19세기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이 새로 출간된 피아노 낱장 악보를 사는 것은 20세기의 음악애호가들이 새로 발매된 음반을 구입하는 행위와 비슷했다. 곧, 음악을 듣고 싶으면 스스로 연주할 수 있어야 했다. 이는 악보 출판업이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며, 베토벤과 같은 음악가들이 악보 출판으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음악학자 니컬러스 쿡의 표현대로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이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잘 행사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사고한 최초의 작곡가”다. 이 점은 베토벤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구별시켜주는 핵심적 면모이기도 하다. 베토벤은 스스로 자신의 음악작품에 번호(opus number)를 붙인 최초의 작곡가에 해당한다.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작품들도 현재는 통용되는 작품 번호가 있지만, 후대의 음악학자들이 그들의 작품을 분류하여 사후에 붙여준 것들이다. 베토벤이 스스로 작품 번호를 붙였다는 것은 물론 베토벤 당시에 초기적 형태로나마 음악 시장에서 저작권 개념이 발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종종 여러 출판사에 자신의 악보를 동시에 판매하는 비양심적 행태도 보였지만, 저작권자로서 “자신의 최종 의도가 반영된 완전하고 권위 있는 판본”을 만들기 위해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곤 했다.

결론적으로, 베토벤은 현대인들이 음악과 음악가에 대해 ‘상식’으로 받아들이는 거의 모든 관념들을 사실상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다. 음악만이 아니라 19세기 이후로 ‘자신의 예술적 영감에 따라 창작하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표상’은 베토벤으로 수렴된다. 음악가로서 치명적인 청력 상실을 극복한 그의 극적인 삶의 이력 또한 이러한 근대적 예술가의 표상에 아우라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오롯이 천재적인 능력과 숭고한 예술정신으로, 더구나 계몽주의와 공화주의, 민중주의의 일관된 신념으로 이러한 일을 해냈다고 베토벤을 영웅시하는 것은 그다지 사실에 부합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음악사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한 절대왕정의 쇠퇴와 중산층 시민계급의 부상이라는 ‘신체제’의 물질적 배경이 베토벤과 같은 유능한 작곡가들을 ‘자유예술가’(물론 과장이 담긴 표현이다)로 설 수 있게 해주었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유예술가의 표상을 필요로 했던 동시대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베토벤은 ‘불멸의 음악가’로 등극했다.

1880년 오스트리아 빈에 건립된 베토벤상. 베토벤의 신성화된 이미지가 느껴진다.

♪ 고전음악의 이데올로기

베토벤을 시대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은 우상화된 베토벤으로부터 그의 미학적 가치를 변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베토벤 스스로 자신의 음악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자부한 측면이 있어 보이지만(오늘날 자의식을 가진 작곡가라면 자신의 음악에 대해서 누구나 베토벤처럼 생각할 것이다), 서양 근대문화의 보편성을 세계만방에 과시하고자 했던 이들에 의해 ‘베토벤의 위대함’은 성화(聖化)되기에 이르렀다. 추상적 기악음악이 만들어내는 낭만주의적 효과가 이를 부추겼다.

여기에는 베토벤의 음악과 이를 전범으로 하는 서양 근대음악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이라는 서양인들의 과장된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한국인으로서 궁금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믿음의 근거다. 중세까지 서양음악의 내적 조화와 일관성은 무엇보다 성경에 기초한 라틴어 가사가 보장해 주었다. 중세의 교회음악은 신의 말씀(logos)으로서 절대성과 객관성이 보증되는, 또다른 의미의 합리적인(베버 식으로 말하면 ‘가치합리적인’) 음악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와 바로크 이후 서양음악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고, 세속적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과 관련되었다. 음악의 세속화와 음악적 가치의 보편성과 객관성은 양립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적절히 답하지 못할 경우 교회음악의 권위는 해체되기 어려웠을 것이며 서양음악은 ‘근대성’을 달성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지난 연재 글들에서 다루어 왔듯이, 서양음악은 한편으로 오페라 양식을 통해 세속적 언어와의 객관적 관계를 탐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기악음악의 해방과 소나타 형식과 같은 음악 내적 논리만으로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는 음악 양식을 발전시켜 가면서 이러한 근대적 과제를 해결해 갔다. 이 과정에서 기초 삼화음을 바탕으로 하는 기능화성의 논리가 성립되었는데, 18세기 초반 라모에 의한 근대 화성학의 정립은 소뵈르(Joseph Sauveur)와 같은 물리학자에 의한 근대 음향학의 발전에 의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서양의 근대 화성학은 근대 과학이라는 합리적·논리적 체계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동기(motive) 단위로 합리적으로 분화된 음악재료를 화성적 어법에 따라 지극히 논리적으로 전개해 가면서도 동시에 감정적 언어로 승화시키는 베토벤의 소나타와 교향곡들은 과학적 언어와 감정 언어의 이상적 결합으로서 음악의 보편적 가치의 실현으로 간주될 만하다.

하지만 화성학에 입각한 라모의 과학주의적 입장에 반대했던 루소나 헤르더와 같은 이들이 제기했듯이 음악이 (또다른 보편성의 근거인) 자연 언어와 같은 것이라면 음악의 보편적 가치는 다양한 민족 언어의 상대적 가치를 온전히 초월할 수 없다. 한편,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관현악곡 ‘웰링턴의 승리’(1813)와 같은 작품을 들어보면, 여성주의 음악학자 수전 매클러리가 ‘폭력적 남성성’의 재현으로 비난한 베토벤 음악의 선동적 측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베토벤 자신은 함께 초연된 교향곡 7번보다 이 곡이 당시에 더 큰 대중적 인기를 얻은 데 대해 불만을 가졌다고 하지만, 교향곡 7번의 들뜬 분위기 역시 국민국가 시대의 개막을 알렸던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과 ‘빈 회의’(1814~15)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되는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베토벤으로 표상되는 서양 근대음악의 보편적 가치는 과장되어서는 곤란하다.

이 점에서 지난 7일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의 문화공연을 거론할 만하다. 10여년 만에 완공되어 올해 초 화려하게 문을 연 엘프필하모니홀에서의 클래식 공연이었다. 메르켈 총리가 선곡했다는 곡목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일부 미디어에서는 같은 시각 함부르크 시내 거리에서 “자본주의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군중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클래식’을 감상하는 위정자들과 억압받는 시민(민중)의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라이브 위성화면으로 생생하게 전했다. 베토벤과 그의 음악이 ‘혁명적 시민’을 재현·대의·표상(represent)한다는 점은 20세기까지의 상식에 속했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 좀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얘기는 베토벤의 음악이 왜 함부르크의 시민 시위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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