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31 20:10
수정 : 2017.08.31 20:32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3) 근대음악의 재봉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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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화가 콜룸바누 보르달루 피녜이루가 1882년에 그린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가정음악회 모습. ‘천재’ 작곡가들의 작품에 편중된 음악사의 기술에서 종종 생략되지만,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적극적인 음악활동은 서양 근대음악의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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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형편은 조금 달라진 듯하지만, 20세기의 ‘진지한’ 클래식 작곡가들에게 ‘대중적’이라는 수식어는 모욕에 가까웠다. ‘대중적’이라는 말은 독창성이 없거나 상업적 요구에 순응하는 비예술적 태도를 함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대중적’이라는 말의 뜻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분명한 한 가지는, 적어도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와 같은 빈 고전주의 작곡가들에게 ‘대중적’이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영예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모차르트의 경우 ‘대중성’에 대한 지향은 ‘자유예술가’로서 활동하고자 했던 그의 소망과도 중첩되었다. 자유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궁정의 귀족들만이 아니라 음악시장을 매개로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대중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빈에 정착한 이듬해인 1782년 말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예약 연주회’를 위해 작곡하고 있는 두 곡의 협주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협주곡들은 너무 쉽거나 너무 어려운 것 사이의 행복한 중간점을 이룹니다. 매우 화려하고 듣기 좋으며, 자연스러우면서도 진부하지 않은 것이지요. 몇몇 패시지들은 오직 감식안이 있는 이들만이 만족을 얻어낼 수 있지만, 음악 공부가 덜 된 이들도 반드시 좋아할 거라 믿어요. 그게 왜 좋은지는 모른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그런 다음 이런 말을 덧붙인다. “예약 티켓 값은 각각 6두카츠(옛 유럽의 화폐 단위)로 하려고요.”
‘민중적’이라는 함의를 가지고 있었던 ‘대중적’(popular)이라는 말이 ‘형제애’를 부르짖던 계몽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모욕적인 수식어가 될 리 없었다. 하지만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19세기 중엽부터 음악비평계를 중심으로 고급(‘진지한’) 음악과 저급(‘가벼운’) 음악의 이분법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대중적’은 차츰 후자에 대한 수식어로 짝을 이루게 된다. ‘대중적’에서 ‘민중적’이라는 함의는 사실상 지워지고, ‘인기 있는’이나 ‘시장에서 잘 팔리는’이라는 의미만 남게 되는 것이다.
♪ 서양음악과 대중적인 것
독일의 20세기 철학자 아도르노는, ‘고급 음악’과 ‘저급 음악’의 영역이 “좁은 산등성이와도 같은 마당 위에서 양식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형태로 화해한 최후의 예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이다”라고 말했다. 모차르트가 죽었던 해이자 <마술피리>가 초연된 해인 1791년 이후로 서양음악이 서서히 ‘고급’과 ‘저급’으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분열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791년은 프랑스 시민혁명의 정점이자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이 출간된 바로 다음해이기도 하다. 칸트 3대 비판서의 완결판이자 그의 미학 사상이 집결된 <판단력 비판>의 출간을 계기로 예술적 ‘천재’에 대한 낭만주의적 관념이 정립되고 확산되었다. 바야흐로 궁정의 음악 시종에 불과했던 음악가들이 ‘신의 대리인’, 말하자면 사제로 등극했다. 이제 서서히 까다로운 비평의 검증을 통과한 소수 ‘천재들’의 ‘진지한’ 음악과 그 나머지로 서양음악은 양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19세기 전반기까지도 분열의 조짐은 미미하게 나타났을 뿐이다. 베토벤을 포함한 초기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들은 여전히 음악의 두 영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예컨대 베토벤은 ‘진지한’ 걸작들을 작곡하는 사이사이에 잘 알려진 <엘리제를 위하여>와 같은 가정음악용 소품들과 연주하기 쉬운 편곡 작품들을 작곡했다. 유럽 전역에서 베토벤보다 높은 인기를 자랑했던 로시니와 같은 동시대 작곡가는 오늘날 뮤지컬계의 로이드 웨버에 상응하는 인기와 대중성을 자랑했으며, 그의 오페라 아리아들은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의 주제곡이 유통되는 것과 흡사한 방식으로 다양한 악기를 위한 편곡 버전으로 출판되어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가정음악회에서 연주되고 노래 불렸다. 쇼팽의 피아노 소품들 또한 오늘날까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면서 만족을 느낄 만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베토벤은 즉흥연주에 능했고 공식적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피아노 즉흥연주는 흥행 요인이 되었다. 대중적 연행으로서의 이러한 즉흥연주 관습은 다음 세대의 대가였던 리스트의 초절기교 피아노 연주로 이어졌다. 우리는 리스트나 파가니니와 같이 당대에 ‘비르투오소’라고 불렸던 이들이 과연 어떤 즉흥적 연주로 음악회의 청중들을 놀라게 하고 즐겁게 했는지를 그들이 악보로 남긴 작품들만으로는 온전히 짐작하기 어렵다. 19세기 후반까지도 협주곡의 ‘카덴차’에 남아 있던 즉흥연주 관습은 20세기 이후에는 온전히 ‘대중음악’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모차르트가 희망을 걸었던 ‘예약연주회’와 같은 새로운 시민사회의 음악 관습은 당시에 폭넓게 형성되어 가던 ‘아마추어’(애호가) 음악문화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궁정 악단의 시대와 현대적인 전문 관현악단의 시대 사이의 과도기에 활동했던 베토벤의 경우, 자신의 교향곡들을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대거 포함된 프로젝트 오케스트라의 형태로 구성하여 초연해야 했다. 후멜, 살리에리(모차르트 독살의 누명을 썼던), 마이어베어와 같은 동료 작곡가들이 ‘품앗이’하듯 관현악 단원으로 참여한 7번 교향곡 초연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 야단법석에 웃음을 머금게 된다. 마지막 9번 교향곡 초연 당시에도 빈 음악협회의 주선으로 아마추어 연주자와 합창단을 포함시킨 전체 연주단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18~19세기에 광범위하게 형성된 ‘대중적’ 음악문화 속에서 짧게나마 서양음악의 ‘직접(참여)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순간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계몽주의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대중적’이란 말은 영예에 가까웠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며, 진지한 고급 음악과 가벼운 저급 음악의 이분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민혁명이 왕정복고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서양 사회가 서서히 관료주의와 시장 지배의 상황으로 흘러들어간 결과다. 하버마스는 이를 두고 서양 사회의 ‘재봉건화’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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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만든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무대 세트. ‘밤의 여왕’이 등장하는 대목이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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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사의 재봉건화
‘사적 개인’의 상대적 개념인 ‘공중’(public)은 맥락에 따라 ‘대중’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공공성’(publicness)은 곧 ‘대중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는 서양의 중세와 봉건시대의 ‘공공성’을 ‘과시적(representative) 공공성’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공중’ 내지는 ‘대중’을 권력자가 ‘대표·재현·대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단계를 의미한다. 오페라를 다룬 연재 글에서 이미 다루어본 바 있듯이, 근대 전환기에 루이 14세와 같은 절대군주는 스스로 모든 백성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의 ‘과시적(대의적) 공공성’을 발휘했다. 그래서 음악 청취를 포함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통치 대상인 백성들에게 ‘모범’으로 비쳐야 했다. 신화적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7~18세기의 ‘오페라 세리아’(진지한 오페라)는 당시 절대군주나 귀족들의 ‘과시적 공공성’을 드러낸다. 화려한 오페라 서곡에서 시작된 궁정 악단의 교향곡 역시 처음에는 그랬다.
하버마스 식으로 보면, 서양의 근대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은 이러한 ‘과시적 공공성’, ‘대의적 공공성’을 넘어서 시민들 스스로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시민적 공공성’(부르주아 공공성)을 형성해낼 것을 목표로 했다. 오페라에서 그 조짐은 ‘오페라 부파’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오페라 부파는 세속의 평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희극 오페라로 이에 상응하는 프랑스와 독일의 양식이 각각 ‘오페라 코미크’와 ‘징슈필’이다. 폐쇄적 궁정 사회를 넘어서 일반 시민들에게도 열리는 ‘공공(대중) 음악회’ 역시 평범한 시민들 사이의 수평적 만남과 민주적 의사소통을 이끄는 새로운 ‘시민적 공공성’을 실현해가는 듯했다. 생활 속에서 다양한 음악적 회합이 이루어진 커피하우스와 가정음악회의 순간들도.
하지만 시민혁명이 왕정복고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19세기의 서양사회는 서서히 관료주의와 시장 지배의 상황으로 흘러들어갔다. 하버마스는 이와 관련하여 서양사회가 이전의 궁정사회에서와 같은 ‘과시적 공공성’에 빠져들어 ‘재봉건화’되었다고 비판한다. 음악과 예술의 경우 교육과 후원의 역할이 교회나 궁정에서 민족국가(공화정부)의 권위주의적 관료시스템 아래 제도화되어 관리되는 한편,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대중적인’ 음악이나 예술은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문화상품’으로 전락하여 자율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때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부르주아 계급 그 자체가 권력화되고 귀족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대중’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분리해내기 시작했고 ‘클래식’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음악작품에 ‘대중적’인 것을 담아내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 이르면 서양음악에서 ‘진지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대중음악’)의 분열은 확연하게 나타난다. 콘서트홀은 ‘불멸의 천재 음악가들’이 머무는 성소(聖所)가 된 반면, ‘평범한 음악가들’의 작품과 아마추어의 음악 활동은 미적 토론이 불필요한 ‘오락’으로 격하되었다. 다시 서양음악에는 궁정의 성벽과 다름없는 사회적 장벽이 세워졌고, 세기말 음악가들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성벽으로 나뉜 어느 한쪽에 자리하여 반쪽 사회의 명성을 쌓거나, 무모하게도 그 성벽의 제거를 다시 한 번 시도하거나. 성벽 제거에 나서는 이들의 전략 또한 양분된다. 대중적 음악언어(공통음악어법)로서의 ‘조성’을 비판적으로 재건하거나, 아예 그것의 무효를 선언하거나.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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