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14) 후기 낭만주의와 말러
20세기 이후 서양의 부르주아 청중들은 ‘새로운 음악’보다는 ‘과거의 음악’에 집착했는데, 그 배경에는 베토벤을 범례로 하는 작곡가의 자율적 형상이 젊은 작곡가들의 자의식 속에 자리 잡은 반면 이를 뒷받침할 경제적 토대는 형성되지 못한 부르주아 문화경제의 불균형이 있었다. 이런 불균형은 부르주아 예술문화에 적대적인 ‘보헤미안’ 예술가의 등장을 낳았다.
오늘날 오케스트라 편성과 악기 배치, 지휘자의 모습은 너무도 확고하게 정립된 나머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내 그런 모습이었던 것으로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이 연재에서 이미 다루었듯이 서양식 오케스트라의 시초는 몬테베르디가 자신의 오페라 <오르페오>를 위해 대규모 관현악 앙상블을 꾸렸던 17세기 초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기 어렵다. 다양한 관악기와 현악기가 조화를 이루는 현대식 관현악의 모습은 18세기 빈 고전주의 시대에 와서야 정립된다. 산업혁명을 거친 19세기 이후 특히 관악기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악기 개량이 이루어짐으로써 오케스트라의 모습은 외관으로나 음향 면에서나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사실상 19세기 이후에야 오늘날 콘서트홀에서 보는 모습과 흡사한 오케스트라가 구성됐다.
산업화와 금속제련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베를리오즈, 바그너, 말러의 화려한 금관악기 사운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이 사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이렇듯 작곡가의 창작 행위에 전체 사회가 성취한 ‘기술의 발전’이 크게 개입하기 때문이다. 말러가 “교향곡이란 하나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시벨리우스에게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추상이나 은유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어떻게 배치하고 어떻게 사운드를 조화시키는가 하는 것은 기술적 합리화가 진행되는 ‘객관적 세계’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오케스트라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모습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20세기 이후의 현대인(적어도 주류 클래식 음악가와 청중)이 세계를 대하는 보수적 태도를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조짐은 이미 말러의 시대에 나타났다. 빈필 지휘자였던 말러는 1900년에 있었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연주 때 전체 작품의 관현악, 특히 금관악기
편성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음과 반복구를 수정하여 연주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초연했던 당시보다 오케스트라의 기술이 훨씬 개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의 청력 문제로 오케스트레이션에도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주의 결과는 어땠을까? 청중의 거부반응에 말러는 바그너의 전례를 거론하며 편곡 연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해명 전단지를 배포해야 했을 정도였다. 말러보다 한 세기 전 부르주아 청중이 ‘세계의 변화’를 추구했다면, 말러 시대에 이르러 청중은 그러한 변화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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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하는 말러의 실루엣을 그린 오토 뵐러의 그림. 음반 시대로 진입하기 직전까지 활약한 터라 지휘자 말러는 오늘날 낯설게 느껴지지만 생존 당시 음악가로서 그의 정체성은 작곡가보다는 유명 지휘자에 훨씬 가까웠다. 말러는 브루노 발터, 푸르트벵글러, 카라얀으로 이어지는 전문 지휘자의 전통을 개시했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말러 이후 지휘자와 작곡가를 겸했던 음악가는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불레즈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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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헤미안 음악가의 탄생
20세기 이후로 서양의 클래식 청중들은 어째서 ‘새로운 음악’을 듣고 싶어 하지 않게 되었을까? 하나의 역사적 흐름을 가진 음악 문화가 어느 순간부터 거의 온전히 ‘과거 음악’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서양음악사가 19세기 말 ‘모더니즘’의 문제에 봉착하는 시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궁정사회(구체제)에서 시민사회(신체제)로의 점진적 변화 과정에서 19세기 이후 여러 복잡한 사회경제적 요인이 음악가, 특히 작곡가의 처지를 모순적 상황으로 몰아갔다. 구체제 후원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음악가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상승한 것은 분명했다. 일반 시민을 위한 음악시장이 형성되면서 작곡가가 이전처럼 궁정 귀족에게 고개 숙일 필요 없이 창작 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작곡가의 자율성은 베토벤의 경우처럼 귀족의 자발적 후원이 부분적으로 뒷받침될 때에야 온전히 성취 가능했다. 19세기 시민사회와 음악시장은 작곡가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기에는 사실상 미흡했다. 당시 음악시장은 댄스홀, 뮤직홀, 콘서트홀 연주 중심이었던 반면, 작곡가의 비빌 언덕이었던 악보출판 시장에선 아직 저작권 개념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결국 음악가로서 고수익이나 안정된 수입을 얻는 것은 작곡보다는 연주 쪽이 훨씬 유리했다. 슈만이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정체불명의 손가락 근육 단련기구까지 써가며 연습하다가 되레 손가락 마비를 겪게 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슈만에게 작곡이나 음악평론은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한 뒤의 차선책일 뿐이었다.
물론 연주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음악작품에 대한 대중적 수요는 이어졌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결합한 독일-오스트리아 음악가들의 미학적 자기정당화 프로젝트가 장기적으로 작곡가들에게 또 다른 악재가 되었다. 1829년 멘델스존의 지휘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1세기 만에 재연되었다. 사실상 대중들에게는 오래도록 잊혔던 바흐의 재발견 이래로 ‘진지한’ 음악회의 레퍼토리에 점차로 ‘전통음악’의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음악가들이 갖게 된 근대 역사의식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이제 19세기 작곡가들은 설상가상 음악시장에서 ‘죽은 천재들’과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브람스가 베토벤의 교향곡 작품의 완성도를 의식한 나머지 자신의 교향곡 1번을 착상 후 무려 20년 뒤에야 완성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가 혼자서 느꼈던 심리적 강박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브람스의 교향곡은 실제 청중들로부터 베토벤의 교향곡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콘서트홀에서 베토벤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21세기 클래식 작곡가도 겪는 어려움이다. 베토벤을 범례로 하는 작곡가의 자율적 형상이 젊은 작곡가들의 자의식 속에 자리 잡은 반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경제적 토대는 사실상 형성되지 못한 부르주아 문화경제의 불균형.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여타의 예술계도 마찬가지였지만 작곡가들 역시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실상 부르주아 시장의 변방에 내몰린 프롤레타리아로서 의식을 갖게 된다. 부르주아 예술문화에 적대적인 예술가의 출현,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묘사하는 ‘보헤미안’ 예술가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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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가 여름휴가 때 작곡에 전념하기 위해 썼던 오두막. ‘여름휴가 작곡가’라는 별명이 가리키듯 휴가 기간에만 작곡에 몰두할 수 있었던 작곡가로서 그의 삶은 사실상 투쟁이나 고행에 가까웠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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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음악의 자기 부정
좀 더 고립된 상태에서도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문학과 미술 분야의 예술가에 비해 작곡가는 좀 더 타협적이어야 한다. 음악은 누군가에 의해 연주되고 들려질 때야 비로소 작품으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작곡가 말러는 빈 궁정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니를 지휘한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안
작곡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그의 출신성분이 보헤미아(체코)와 관련이 있다는 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여름휴가 작곡가”라는 별명이 가리키듯 그는 지휘가 없는 휴가 기간에만 작곡을 하고도 아홉 개 대규모 교향곡(미완성의 10번 교향곡과 사실상의 교향곡인 관현악곡 ‘대지의 노래’를 포함하면 열한 개의 교향곡)을 써냈다. 지휘자가 아닌 작곡가로서 그의 삶은 투쟁이나 고행에 가까웠다.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 악보 또한 자비로 출판해야 했다.
앞서 소개한 베토벤 교향곡 편곡의 해프닝에서 보이듯 말러 시대 청중은 이미 교향곡과 같은 음악 양식을 ‘변화 가능한 세계’의 표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미 독점 자본주의 단계로 진입하고 제국주의 식민지 건설로 부도덕한 부를 쌓은 서양 시민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자의식을 가진 예술가의 눈에는 바야흐로 속 빈 강정의 귀족 행세를 하는 부르주아 속물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말러가 목소리를 위한 가곡에 쓰고, 자신의 여러 교향곡에도 활용한 독일 민요시 모음집 <아이들의 이상한 뿔피리>에는 독일의 민중 문화에 바탕을 둔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반항적 세계관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파두아의 성 안토니우스’라는 시의 내용을 보면, 물고기로 의인화된 부르주아 속물의 타락상이 우스꽝스럽게 풍자된다. 말러는 이 시에 곡을 붙이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연상시키듯 음계를 순차적으로 오르내리는 선율을 통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부르주아 세계상을 표현했다. 그는 후에 ‘부활’이라는 부제를 붙인 교향곡 2번 3악장에서 이 선율을 재활용하여 기악적으로 확장했는데, 이 선율을 계속해서 반복해가다가 갑자기 요란한 불협화음과 함께 음악적으로 와해시킨다. 마치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듯.
서양 근대 음악이 자신의 토대가 되었던 부르주아 문화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통과 관습의 해체와 파괴야말로 구체제에 대항했던 계몽주의와 시민혁명의 핵심 정신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체를 통한 재구성 또한 그러한 정신에 속했다. 말러가 ‘이제 그만!’을 외치면서도 동시에 근대음악의 ‘부활’을 기도했던 것처럼.
인상주의 음악가로 일컬어지는 드뷔시 역시 이 점에서 말러와 통했다면, 그들보다 더 젊은 쇤베르크는 좀 더 급진적이었다. 음악적 문제의 핵심은 기능화성적 조성체계에 대한 이들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 글에서 이어서 다루기로 한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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