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5) 기능화성과의 결별
20세기 전환기에 이르면 기능화성이나 조성음악 어법은 상당 부분 균열이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쇤베르크는 열두 개 음이 전체 작품에서 출현하는 빈도수를 인위적으로 균질화하는 등 ‘주관화된 음조’를 시도했다. 다만 대중들과의 소통 능력 상실이란 대가를 피할 수 없었다. 20세기 이후 적어도 대중과 소통해 온 서양 음악사는 말러나 드뷔시 등이 보인 절충적인 시도가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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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작곡을 가르치고 있는 오스트리아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의 모습. 그는 조성음악을 폐기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무조음악’을 만들었다.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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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 왔던 서양근대음악은 하나의 종말론적인 서사를 갖고 있다. 중세 교회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된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시대 이후 3세기 남짓의 화려한 음악적 향연을 벌이다가 20세기로 진입하면서 장엄하게 막을 내린다는 줄거리다. 20세기 초반 서양 근대문화의 종언을 알리는 듯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러한 서사에 극적인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오페라가 탄생하던 17세기를 경계로 서양음악이 이전과 크게 달라졌던 것처럼, ‘무조(無調)음악’이 출현했던 20세기를 경계로 서양음악은 또 한 번의 혁신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것(좀더 과감하게는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는 것), 그 3세기가량의 역사를 음악사가들은 ‘공통음악어법 시대’(common practice era)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종말론적 서사는 그 ‘종말’의 시점으로부터 1세기가 지난 현재에 돌이켜보면 상당 부분 역사가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사실상의 신화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공통음악어법 시대’의 핵심인 ‘기능화성적 조성’이라는 음악어법이 다양하게 변화된 형태로나마 21세기 현재에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한국인만 해도 그렇다. 알고 있는 ‘음계’(scale)를 한 가지만 불러보라고 하면 대부분 ‘도레미파솔라시’의 서양 온음계(장음계)를 부르게 될 것이다. 기능화성은 바로 이 ‘온음계’에 입각하여 화성적으로 구축된 체계다. 나아가 기능화성의 발명품인 ‘C메이저’니 ‘A마이너’니 하는 표준적 화음들(chords)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유통되고 있다. 기능화성은 20세기 이후 오히려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어 ‘공통음악’이라는 명칭에 더욱 부합하게 된 것이다.
결국 20세기 음악사에서 서술되는 ‘공통음악어법 시대의 종언’이나 ‘기능화성으로부터의 결별’은 음악사에서 보편화된 사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서양의 엘리트 작곡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어떤 급진적 성찰과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음악 운동을 뜻한다고 한정시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급진적 음악운동은 서양음악의 ‘근대성’을 표상하는 기능화성으로부터의 과감한 결별을 통해 ‘탈근대성’ 내지 ‘초근대성’을 지향해 왔다. 이러한 음악적 상상력의 확장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양 극점 사이에서 다양한 음악적 자유를 추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미 있다.
♪ 쇤베르크와 주관화된 음조
서양음악사에서 기능화성적 조성으로부터 결별의 조짐은 19세기 후반으로 돌입할 무렵 이미 바그너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에서 나타났다. 불협화음의 협화음으로의 ‘해결’을 통해 ‘갈등-해결’의 서사를 창출하는 기능화성의 기본 논리가 바그너의 음악극에서는 무력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무엇보다 음악적 종지(終止)를 회피하는 바그너의 ‘무한선율’ 기법 때문이었다. 세 시간이 넘는 연주 시간 동안 종지가 없이 음악이 흐르게 되면 ‘갈등-해결’ 내지 ‘긴장-이완’의 기능화성적 도식은 사실상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종지가 없는 대신 극적 상황변화를 음악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바그너는 계속해서 조를 바꾸었는데, 무한선율과 함께 이러한 전조(轉調) 기법이 고도화되면서 이제는 ‘으뜸 조’라는 개념조차 희미하게 되었다.
음악사에 기록되는 후기 낭만주의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정도차는 있지만 대부분 바그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이르면 기능화성이나 조성음악 어법은 상당 부분 균열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전체 음악사를 보는 균형감이 필요하다. 예컨대, 바그너와 동시대 작곡가로서 오페라계에서의 대중적 영향력은 훨씬 컸던 베르디의 경우 기능화성적 조성음악을 거의 균열 없이 구사하고 있었다. 물론 바그너의 음악적 영향 또한 대중적 차원에서 20세기 영화음악으로 이어지지만, 기능화성적 조성 어법이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작곡계에서 온전히 무력화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기능화성적 조성과의 결별을 극적으로 선언한 작곡가는 물론 오스트리아 작곡가 쇤베르크다. 초기작인 <정화된 밤>이나 <구레의 노래>에서 후기 낭만주의의 조성적 어법을 치밀하고 급진적인 방식으로 구사하던 그가 기능화성적 조성을 온전히 폐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은 1908년에 발표한 현악사중주 2번이다. 성악이 삽입된 마지막 악장의 “나는 다른 혹성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는 가사는 의미심장하게도 조표가 그려지지 않은 악보와 함께 ‘무조음악’에 대한 선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무조’, 즉 ‘조성이 없다’는 표현은 좀더 신중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쇤베르크 자신은 ‘무조(atonal) 음악’이란 명칭을 거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쇤베르크는 좁은 의미의 조성(기능화성적 조성)을 거부했을 뿐, 넓은 의미의 조성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차라리 ‘범조(汎調, pantonal) 음악’으로, 즉 모든 음에 중요성이 실리는 음악으로 불리기를 바랐다.
요컨대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문자 그대로 ‘조가 없는’ 음악이라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주관화된 조(음조, tone)’를 가진 음악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의 특수한 ‘말투’와 비슷한 것이 될 텐데, 쇤베르크는 실제로 이와 비슷한 실험을 <달에 홀린 피에로>라는 작품에서 선보였다. 실내악 앙상블의 연주를 배경으로 소프라노가 ‘슈프레히슈티메’(Sprechstimme) 혹은 ‘슈프레히게장’(Sprechgesang)이라고 일컬어지는 음악과 언어 사이의 중간적 성격의 낭송조 음들로 노래하도록 한 것이다. ‘주관화된 음조’에 대한 쇤베르크 악파의 추구는 ‘12음기법’(twelve tone technique), 혹은 ‘음렬주의’(serialism)라고 불리는 작곡법의 창안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12개 음이 전체 작품에서 출현하는 빈도수를 인위적으로 균질화하는 음렬주의 작곡법의 시도는 20세기 후반 음높이 외에 셈여림 등의 요소까지 제어하는 ‘총렬주의’(total serialism)로 이어졌다.
17세기 이후 근대의 기능화성적 조성 체계는 12평균율을 통해 음들을 형식적으로 균질화한 다음, 으뜸음에 중심적 위치를 부여하고 다른 음들을 그에 맞추어 기능화했다. 이는 형식적으로 평등한 시민들이 전제되지만 결국 권력이 소수에게 위계적으로 집중되는 ‘대의 민주주의’를 표상한다고 할 만하다. 반면, 쇤베르크의 음렬주의는 음들의 형식적 균질화만이 아니라 음에 실리는 비중까지 동등하게 분배됨으로써 ‘직접 민주주의’의 한 가지 형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쇤베르크의 난해한 무조음악과 음렬주의음악을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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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조성의 위기'는 시각예술에서 '재현의 위기'와 상동성을 갖는다. 쇤베르크와 실제적인 만남과 교분을 가졌던 칸딘스키의 그림. '인상3'이라는 제목과 '콘서트'라는 부제를 가진 이 그림은 1911년 당시 화가가 쇤베르크의 연주회에서 느낀 감흥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뮌헨 렌바흐하우스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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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 너머의 조성
하지만 쇤베르크와 같이 조성(음조)을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주관화할 때, 피할 수 없는 대가는 대중과의 소통 능력 상실이다. 쇤베르크 이후 20세기의 이른바 ‘현대음악’은 사실상 청중을 잃어버렸다. 이 점에서 쇤베르크보다 조금 나이든 선배들이지만 말러와 드뷔시의 절충적 행보는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말러의 경우 예컨대 교향곡 1번 느린 장송곡풍의 3악장에서 익숙한 장조의 동요 선율을 최저음부 현악기인 콘트라베이스를 써서 음울한 분위기의 선율로 바꾸어 썼는데, 이 선율이 관악기 등을 통해서 반복 변주되면서 구사되는 조성은 사실상 ‘단조’의 범위를 넘어선다. 악장 내내 청중은 불쑥불쑥 카바레풍의 집시 선율과 리듬, 유대인의 민속음악인 클레츠머를 연상시키는 선율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당시의 청중이라면 누구나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말하자면 ‘집시 조(調)’와 ‘유대인 조’가 말러의 음악에서 들려왔다.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에 퍼져가던 반유대 정서를 고려할 때 말러의 교향곡 데뷔작이 빈의 일부 음악평론가와 청중의 분노를 산 것도 이해할 만하다. 요컨대 말러는 장단조의 기능화성적 조성에 머물지 않고 민요선법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조성 재료를 자신의 교향곡 속으로 끌어들였다. 교향곡 형식의 <대지의 노래>에서는 한시(漢詩)를 텍스트로 쓰면서 중국풍의 선율까지 구사했다.
드뷔시의 경우도 조성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는 말러와 공통점이 있다.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에 바탕을 둔 관현악곡 <목신의 오후 전주곡>에서 전형적으로 들을 수 있는 드뷔시 특유의 온음음계(whole tone scale, 반음 없이 온음으로만 구성된 6음 음계)는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파리 세계박람회에서 접한 인도네시아 자바의 가믈란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기능화성적 조성의 ‘기능’ 설정에 필수적인 4도와 5도 음을 결여한 드뷔시의 온음음계는 말하자면 ‘비기능’ 화성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갈등과 해결의 기능적 도식에서 벗어난 드뷔시의 화음은 마네나 모네의 인상주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빛의 향연, 다시 말해 ‘음색’의 향연을 연출하는 것이다. 요컨대 말러나 드뷔시는 ‘조성 너머의 조성’을 추구한 셈인데, 20세기 이후 적어도 대중과 소통해 온 음악사는 이러한 절충적 시도가 주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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