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26 19:48
수정 : 2017.10.26 20:59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6) 20세기 이후의 클래식
쇤베르크의 ‘사적 연주회’는 일견 시민사회의 ‘공공 연주회’ 관습을 냉소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공공 연주회의 초심을 되찾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연주회 기획을 정부 관료나 시장의 대리인에게 맡기지 않고 음악가 스스로 청중과 직접 연대한다는 발상을 보여줬다. 음악은 연주되어야 하며, 청중과 소통해야 한다. 20세기 클래식 역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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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음악교육 지원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의 결과물로 유명한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가 2013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공연하고 있는 모습. 마르시우 지아시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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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사’의 독자들은 20세기의 클래식(‘현대음악’)을 ‘19세기 이전의 클래식과의 단절’로 받아들이는 데에 지나치게 익숙하다. 서양음악사의 20세기 항목에는 쇤베르크의 음렬주의 이후 존 케이지로 대표되는 ‘우연성 음악’을 비롯하여 피에르 셰페르의 ‘구체음악’이나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전자음악’, 스티브 라이시나 필립 글래스 등에 의한 ‘미니멀음악’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이전의 작품들과는 거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음악들이 주로 거론된다. ‘대중음악’의 광범위한 영역을 20세기 음악사에서 제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하더라도 ‘클래식’에서도 모더니즘 계열의 전위적 음악가에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는 음악사 서술이라 할 만하다. 이에 앞서 작곡가와 작품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연주의 역사’를 도외시하는 편향 또한 지적될 필요가 있다.
음악은 무엇보다 연주되어야 하며, 청중과의 소통이 있어야 한다. 클래식을 포함한 모든 음악사는 작곡가와 작품의 역사이기에 앞서 연주의 역사이며 음악적 소통의 역사다. 20세기의 전위적 클래식 음악가들에게조차 이 점은 마찬가지다. 그들은 엘리트주의적으로 청중과의 소통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잘못 전해진 소문과 같은 것이거나 소통에 대한 그들의 더욱 간절한 갈망이 반어법적으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쇤베르크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 쇤베르크의 사적 음악연주 협회
쇤베르크는 빈에서 ‘사적(私的) 음악연주 협회’라는 모임을 설립하고 1919년에서 1921년 사이에 제자였던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 등의 작곡가와 루돌프 콜리슈 등의 연주가들과 함께 이 협회에서 매주 주최하는 특별한 음악회를 이끌었다. 협회 이름에 담긴 ‘사적(private) 음악연주’라는 표현이 이 모임과 음악회의 성격 또한 규정했다. 폐쇄적인 회원제로 운영되었던 이 연주 모임에는 평론가와 기자의 입장이 거부되었다. 그것은 일견 시민사회의 ‘공공(public) 연주회’ 관습에 대한 냉소적 관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쇤베르크의 ‘사적 연주회’는 오히려 모차르트와 베토벤 시대에 이루어졌던 ‘공공 연주회’의 초심을 되찾고자 한 측면이 있다. 19세기 후반 이후 한편으로 민족국가의 관료화된 정부가,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화되는 자본주의 시장이 시민사회의 공공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하버마스가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개념화했던 이러한 현상은 음악가들의 자율성 위기로 나타났다. 쇤베르크는 무엇보다 연주회의 기획을 정부 관료나 시장의 대리인에게 내맡기지 않고 음악가들 스스로 청중과의 직접적 연대 속에서 실행해낸다는 적극적 발상을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공공 음악회의 초기 형태인 ‘예약 연주회’ 시스템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작 음악이 ‘공공연주회’에서 연주되기 힘든 현실에 맞선 음악가들의 필사적이라고 할 만한 한 대응이었다. 쇤베르크의 연주 모임이 무조음악과 같은 전위음악을 청중에게 주입하거나 교육하기 위한 목적을 띤 것은 아니었다. 말러 이후 동시대 작곡가의 작품으로 연주곡목을 제한하기는 했지만, 첫 두 해 동안은 쇤베르크 자신의 작품을 전혀 연주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막스 레거와 클로드 드뷔시와 같은 후기 낭만 시기의 조성음악 작곡가들의 작품을 자주 무대에 올렸다. 다만 소규모 앙상블을 위한 치밀한 편곡이 가해졌는데, 이러한 재해석을 통해 작품은 새롭게 연주되었다. 오스트리아를 강타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협회 운영이 큰 위기에 부닥쳤을 때(결국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협회는 해산한다) 쇤베르크와 베르크, 베베른이 직접 나서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대중적인 왈츠 작품들을 소규모 실내악으로 편곡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작품 선정에서 대중성을 고려하더라도 연주에서 새로운 해석이 가해져야 한다는 원칙은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작품과 연주 자체에 집중하기 위해 박수를 비롯한 어떠한 비평적 반응도 금지했다고 하는 이 음악회의 풍경이 그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리허설이 공개되기도 했고 실제 공연 중에도 작품 이해를 위해 필요성이 인정될 경우 동일 작품이 반복 연주되었던 만큼 쇤베르크의 연주 모임은 다른 의미의 자유로운 음악적 소통을 추구하고 있었다고 할 만하다. 3년여에 걸쳐 매주 음악회를 열었던 이들의 노력은 비정상적 경제위기라는 외적 요인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가깝게는 ‘국제현대음악협회’(ISCM)의 발족으로 이어지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의 모태가 되었다.
쇤베르크의 사적 연주 모임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음악 환경에서 재해석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한국의 경우 지난 10여년간 서울시향에서 운영중인 현대음악 연주회 프로그램 ‘아르스 노바’가 쇤베르크의 연주 모임의 발상과 통한다고 하겠으며, 작곡가 박창수의 하우스콘서트 운동 또한 그 한 가지 예가 될 수 있겠다. 쇤베르크가 역설적 표현이나마 ‘사적’ 연주를 표방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아이디어는 디지털과 사회관계망(SNS) 시대를 배경으로 클래식 음악가들이 자발적 다중과 새로운 발상의 음악 공동체를 형성하여 진지하고 폭넓은 음악적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한 가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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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살의 나이로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어 세계적인 지휘자로 발돋움한 베네수엘라 출신 음악가 구스타보 두다멜. 안나 훌트,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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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래식 연주의 공공성
20세기 이후 클래식에서 새로운 작품의 창작이 위축되었고, 작곡보다는 연주가 주도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로 ‘클래식’ 이외의 음악 영역(특히 ‘영화음악’)은 물론 비서양 세계의 클래식까지 고려한다면 20세기의 음악사에서 창작이 반드시 위축되었던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며, 둘째로 20세기의 클래식 음악 환경에서 ‘연주’ 그 자체에 새로운 의미를 요청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후자의 논점과 관련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의 음악론을 참고할 만하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면서 음악에 대한 비평서를 여러 권 남긴 사이드는 ‘작곡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20세기의 음악계를 비관적으로 진단한 아도르노의 음악철학에 일종의 반론을 제기했다. 20세기에 작곡가들 대신 연주자들이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와 맺는 클래식의 생산적 관계가 정체되거나 퇴행하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예컨대 글렌 굴드와 같은 피아니스트가 생전에 보여준 기행에 가까운 예술적 실천이 작곡과는 다른 의미에서 생산적 사회관계를 창출했다고 본다. 굴드가 연주회를 거부하고 리코딩 작업에 전적으로 몰두했던 점, 시각 매체를 활용하여 음악에 대한 강연과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행한 점, 무엇보다 상식을 초월한 그의 악곡 해석과 연주 기교에 주목하면서 이 모든 것을 ‘공적 행위’로서의 굴드의 ‘연주’(연행, performance)로 간주한다. 일생에 걸쳐서 보여준 연주가로서 굴드의 전략이 “연주에서 그 과정의 본질을 이루는 재해석과 재생산이라는 성질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연주를 세계 자체에 참여시키거나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사이드는 지적한다. 다른 한편, 특수한 해석적 경험을 동반한 개별 청중의 음악 듣기 행위 또한 넓은 맥락에서 ‘연주’의 일부라고 할 때 연주의 생산적 의미는 더욱 커진다.
클래식 음악의 세속화와 근대적 제도화 과정에서 다른 공적 영역과 맺는 매우 복잡하고 다각적인 관계들이 형성되어 왔다. 이런 복잡한 관계망에서 ‘연주’의 의미는 점점 더 다층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클래식의 경우 체계적이고 치밀한 공적 교육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작품 해석을 위한 기교의 기초적인 단계에도 진입하기 어려우며, 크고 작은 연주단체의 성립과 유지, 공공 연주회의 기획과 성사에도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에서부터 민족주의와 같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경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회적인 문제들이 개입한다. 표준화된 악보를 통한 클래식의 ‘만국 공통어’로서의 성격, 초국적이고 국제적인 교류 가능성에 의해 이 점은 더욱 증폭된다. 클래식을 ‘연주한다’는 것은 그 행위의 성립을 위한 전제에서부터 이미 지극히 사회적이며 공적이다.
물론 재해석으로서의 ‘연주’가 창작으로서의 ‘작곡’을 온전히 대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클래식 ‘연주’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적절하게 고려될 수 있을 때 클래식 작곡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혁신적 음악교육 시스템인 ‘엘 시스테마’와 시몬 볼리바르 오케스트라를 통해 배출된 세계적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의 음악가로서의 성장 과정과 엘에이(LA)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한 뒤 미국 서부의 라틴계 지역 공동체를 위해 행했던 일련의 교육과 연주 활동은 사이드가 말한 클래식 ‘연주’의 폭넓은 사회적 의미를 재확인시켜 준다. 나아가 두다멜의 엘에이필이 라틴아메리카의 민속음악을 활용한 새로운 관현악 작품들과 라틴계 작곡가들을 청중에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클래식의 세계화와 관련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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