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7) 대중매체와 대중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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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에 출판되어 그해에만 200만부 이상 팔려 ‘틴 팬 앨리’ 역사상 가장 큰 히트곡으로 기록되었던 ‘애프터 더 볼’의 낱장 악보(시트뮤직) 표지 이미지. ‘대중음악’의 산실로 평가되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틴 팬 앨리’ 음악산업은 20세기 초까지도 악보출판업으로서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다. 낱장 악보라는 뜻의 ‘시트뮤직’이라 불렸던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 악보로서 한국에서 한때 인기 있었던 ‘피아노 피스’ 악보와 유사하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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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에서는 서양 근대음악의 특성 가운데 공공성과 대중성 추구라는 점에 특히 주목해왔다. 지난 연재에서 다룬 것처럼 공공성과 대중성은 한편으로 동의어일 뿐만 아니라 ‘대중’과 ‘대중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시민혁명 이후의 형식적 민주주의 사회와 산업화 사회를 전제로 한 서양 근대문화의 산물이다. 따라서 20세기 이후에 통용되기 시작한 ‘대중음악’이라는 용어 또한 개념상 서양 근대음악의 다른 일면을 가리키거나 적어도 서양음악의 근대성과 직간접으로 연관된 음악을 일컫는 용어일 수밖에 없다.
‘대중’을 단순히 수량의 문제로 생각해도 그렇다. 서양음악의 세속화와 상품화 과정은 음악 청중을 불특정 다수로 확대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기인 19세기 후반 이후 서양음악은 종종 ‘엽기적’이라 할 만큼의 대규모 연주자와 청중을 동원하려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예컨대 1857년부터 1926년까지 영국 런던의 수정궁에서 3년에 한 번씩 거행된 헨델 페스티벌의 경우 2000명 이상의 합창단과 400에서 500명을 헤아리는 관현악단이 무려 8만여명의 청중 앞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했다. 한편, 가까운 일본의 오사카에서는 매년 연말이면 1만명의 합창단원이 참가하여 베토벤 9번 교향곡 <합창>을 연주하는 스펙터클한 이벤트를 벌인다. “만인의 포옹”을 주문하는 <합창> 교향곡의 가사에 착안한 것으로 보이는데, 원어 가사를 직역하자면 ‘백만인’(Millionen)이니 1만명의 합창단원조차 적은 수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만인의 노래’를 상상하고 이를 실현해내기까지 하는 것은(휴머니즘을 넘어서 전체주의의 부정적 함의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지구상의 전통적 음악 문화 가운데 오직 서양 근대음악 문화만이 갖는 ‘대중적’ 특성이다. 그 발상과 실천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일차적으로 악보와 인쇄 문화였다. 대량 인쇄된 악보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 이래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다양한 음악작품이 대중적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아마추어 음악가들이 음악을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도구가 되어주었다. 악보의 이러한 ‘대중매체’로서의 기능은 19세기 말의 놀라운 발명품이 서서히 넘겨받게 된다. ‘소리를 기록한다’는 뜻의 ‘포노그래프’(phonograph) 혹은 ‘그라모폰’(gramophone) 등으로 불린 축음기(蓄音機)다. 물론 에디슨이나 베를리너가 축음기를 발명할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기계적 재생장치가 20세기 이후 문자 그대로 ‘백만인의 노래’를 실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 음반산업과 대중음악
대량 인쇄된 악보는 이미 대중매체였다. 흔히 ‘대중음악’의 산실로 평가되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틴 팬 앨리’ 음악산업은 20세기 초까지도 악보출판업으로서 성격을 고수하고 있었다. 낱장 악보로 판매된다는 의미에서 ‘시트뮤직’(sheet music)이라 불렸던 피아노 반주가 딸린 노래 악보는 1890년대에 이미 ‘애프터 더 볼’(After the Ball, 1892)과 같은 ‘밀리언셀러’ 히트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910년에 이르면 미국 내 ‘시트뮤직’의 판매량은 무려 3천만부에 달했다고 한다. 음악상품의 주도적 매체가 악보에서 녹음된 음반으로 바뀌는 것은 마이크로폰을 쓰는 전기녹음 방식을 채택하여 축음기의 비약적인 음질 개선이 이루어진 1920년대 중반 이후다.
연주 그 자체를 물질적 대상(음반)에 기록하여 상품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음향재생 기술은 근대적 음악문화의 패러다임을 크게 변화시켰다. 20세기에 미국과 유럽의 음반산업은 시종일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초국적(transnational)이며 전지구적인 사업의 성격을 보였다. 재생 기술과 대량복제 기술이 궤도에 올랐던 1920~30년대에 이미 컬럼비아레코드나 빅터레코드와 같은 국제적 음반사들은 일본에 지사를 두고 식민지 조선에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 ‘유행가’나 ‘신민요’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새로운 음악은 이들 초국적 음반사의 ‘현지화’ 전략의 산물이다. 다음 연재에서 살펴볼 ‘블루스’ 음악이 미국내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음반사의 현지화 전략의 산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음악’(유행가/대중가요)이 하나의 구별되는 장르 명칭처럼 인식된 것은 악보를 대신하여 음반이 음악시장의 주도적 매체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 과정과 맞물린다. 특히 한 면에 3~4분으로 재생시간이 제한되었던 분당 78회전 유성기 음반이 대중음악의 외적 형식을 일찌감치 결정했다. 20세기 중반에 재생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엘피(LP) 음반이 유성기 음반을 대체한 뒤에도 한 곡당 3~4분의 재생시간은 유지되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음반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특수한 외적 형식을 결과한 셈이지만, 대중음악의 양식적 성격이 이전의 서양음악 양식과 뚜렷이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서양음악이 본격 수용되던 20세기 초반 한반도의 음악적 상황을 살펴볼 만하다. 당시에 어떤 노래를 ‘창가’(唱歌)라고 부르든, ‘동요’나 ‘가곡’(예술가곡)이라고 부르든, ‘유행가’라고 부르든, 그 노래는 ‘서양음악’(양악)으로서 받아들여졌을 뿐 적어도 초기에는 장르적 구별조차도 어려웠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의 작곡가들, 특히 안기영이나 홍난파와 같은 이들은 동요와 가곡은 물론 유행가와 신민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음악 장르의 창작에 관여했다.
실제로 대중음악의 몇몇 표준적 양식은 서양음악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컨대 20세기 영미의 주류 ‘팝음악’은 18세기 영국 발라드 오페라와 유럽 중산층의 거실음악(parlor music) 전통에서 비롯된 ‘가볍고 단순화된 클래식’으로서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20세기는 영미 ‘팝음악’에 의해 계승된, 한층 심화된 의미의 ‘공통 음악어법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생기술을 통해 서양식 조성 음악이 지구촌 전역의 일상적 공간에서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근대적 ‘작품’ 개념을 기반으로 한 서양 근대음악 문화의 여러 이데올로기적 관념 또한 20세기 이후의 대중음악 문화에 관철되어 왔다. ‘천재 음악가’나 ‘불후의 명곡(앨범)’과 같은 관습화된 비평적 수사법에서 이는 잘 드러난다. 즉흥연주를 중시하는 재즈의 경우에도 예컨대 ‘비밥’과 같은 ‘모던 재즈’를 규정하는 양식 판단의 기준은, 댄스 반주 음악으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나 음악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서양음악의 모더니즘 미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요컨대 ‘대중음악’은 독립적인 장르 명칭이라기보다는 녹음 매체와 재생기술을 통한 서양 근대음악의 외연 확대와, 거기에서 비롯된 비서양 음악과의 만남과 소통 가능성을 가리키는 수사로 여겨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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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로 간주되는 <황성의 적>(황성옛터) 음반 표지. 1920년대 말 연극 무대의 막간 노래로 불리다가 1932년 빅터레코드에서 이애리수의 노래로 발표되었다. 출처 매니아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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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음반 시대
연주 그 자체를 기록할 수 있는 녹음 기술의 이점과 일찌감치 초국적 음악 교류를 실현한 다국적 음반사의 현지화 전략은 20세기 내내 대중음악의 양식적 잠재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초기부터 클래식 작곡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재즈나 블루스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음악과 탱고나 룸바 같은 라틴아메리카 음악은 물론이요, 최근에는 더욱 다양한 비서양 세계 민속음악 양식의 침투에 의해 대중음악의 외연은 걷잡을 수 없이 넓어지고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 컴퓨터 미디음악의 발달에 이어 21세기 초입부터는 ‘음반’ 산업이 디지털 ‘음원’ 산업으로 대체되는 매체 환경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재즈와 대중음악은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공교육 체제를 갖추고 공공 영역으로 들어선 지 오래다. 최근에는 대중음악 분야도 정부의 문예진흥기금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문화 관련 예산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비제도권에서 발휘되는 예술적 창조력이 대중음악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섭섭한 일일 수 있겠지만, 이제 클래식과 마찬가지로 제도화된 대중음악도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의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케이팝과 한류 문화산업이 정부의 문화정책상의 핵심을 이루고,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오른 사건이 ‘국가적 경사’로 간주되는 나라에서 그러한 고민은 새삼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중음악’이 20세기 음반산업에 의해 정의되었다고 할 때, 이제 21세기 ‘포스트음반 시대’의 새로운 매체 환경에서 ‘대중음악’의 의미는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앞으로 2회의 연재는 포스트음반 시대의 관점에서 20세기 대중음악을 재탐색하는 데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유튜브’를 비롯한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에서 우리는 옛 음악과 현재의 음악을 불문하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음악을 편견 없이 접할 수 있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가정용 컴퓨터 한 대로도 작곡을 하고 20세기의 음반사 못지않은 홈리코딩을 하여 디지털 플랫폼과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다. 서양 근대음악은 이미 ‘대중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음악적 민주주의, ‘만인의 노래’에 우리는 한 걸음 더 접근해가고 있는 중이다.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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