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20) 서양음악의 지방화
공감을 추구해온 서양음악은 시민, 국민, 민족, 대중 등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을 재현하거나 대표하는 음악이라는 ‘음악적 공공성’의 관념을 낳았다. 그러나 서양음악의 보편성만 강조하는 것은 자칫 비서양 음악문화의 특수성과 고유한 가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서양중심주의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탈중심화한 음악 소통의 민주적 실현이 오늘날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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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음악회 당시 포스터 속 합성사진. 1980년 당시 도청 앞 광장에 모였던 광주 시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연주 장면을 합성하여 ‘시민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음악’을 시각화했다. 당시 광주시향의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였던 구자범은 상징적인 518명의 ‘시민합창단’(어린이와 아마추어가 포함된)을 이끌고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지휘했다. 4악장과 5악장의 독일어 성악 가사는 철학자 김상봉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어로 노래 불렸다. 장소성에 토대를 둔 클래식 음악계의 성공적인 문화 번역의 사례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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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연재의 마지막 회다. 이 연재의 목적은 ‘우리에게 서양음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전제로 서양음악의 다양한 면모를 그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살피는 데에 있었다. 적어도 20세기 이후 한반도의 음악문화에서도 받아들인 서양음악의 보편적 개념들이 있다. 완결되고 고정된(상품의 형태로 교환 가능한) ‘음악작품’ 개념이나 그러한 ‘작품’을 생산하는 자율적 주체로서 ‘작곡가’와 같은 보편적 개념이 서양 근대 음악문화에서 발생했다. 나아가 수직적 화음들의 운용법칙으로서 체계화한 ‘기능화성’ 또한 서양 근대 음악문화의 산물로서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화해 있다. 이 연재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았듯이 르네상스 시기 이후 인쇄술과 연동되어 치밀하게 발전한 기보 문화,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의 형성과 맥을 같이하는 시민(부르주아) 음악문화가 서양에서 그러한 보편적인 음악개념들과 관습들을 발생시킨 토대였다.
♪ 음악과 공감
서양 근대음악의 가장 강력한 보편적인 성격은 500년 전 종교개혁 시기 루터의 코랄 찬송가 정신이 그랬듯이 ‘쉽게 부를(연주할) 수 있다’는 데 기반한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유명한 ‘도레미송’ 장면에서 주인공 마리아가 했던 말, “일곱 개의 음만 알면 무슨 노래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서양 근대음악의 휴머니즘 정신을 상징해준다. 개화기의 기독교 찬송가와 창가가 그토록 쉽게 한반도 민중의 정서에 파고들 수 있었던 요인도 이러한 단순함의 휴머니즘 덕분이었다. ‘평균율’을 다룬 연재에서 자세히 논했듯 서양의 근대적 음사고의 바탕을 이루는 이러한 수학적 ‘명석판명함’이 역설적으로 서양음악의 복잡한 구축성의 전제가 되었다.
평균율과 함께 진화해온 기능화성 역시 서양 근대의 ‘쉬운 음악’에 대한 추구의 산물이다. 오늘날에도 아마추어 음악 행위가 기타나 피아노의 코드를 짚는 데서 시작하듯이 기능화성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공통음악어법’으로 남아 있다. 기능화성은 20세기 이후 특히 재즈와 같은 혼종적 음악 양식을 통해 장단조의 이분법을 넘어서 선법적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서양과 비서양의 서로 다른 음조(조성)들이 만나고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전지구적 음악 플랫폼의 구실을 하고 있다.
물론 서양음악의 수학적이고 평균율적인 음사고와 기능화성이 기보되기 어려운 미분음적 세계를 억압하고 타자화한 측면은 분명히 있다. 20세기 이후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음악 정신은 이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서 비롯되어 일정 부분 ‘반근대적’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서양음악의 보편적 정신은 음악적 ‘공감’(共感)에 대한 추구에 있다. 공감은 계급과 계층을 넘어서고, 타자에 대한 이해를 전제한 상호 인정의 감성적 지평에서만 온전히 상상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특히 모차르트에서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시민혁명기 근대적 작곡가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다가온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러한 공감에 대한 추구가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을 재현하거나 대표하는(represent) 음악’이라고 하는 음악적 공공성(publicness)에 대한 관념을 낳았다. 베토벤의 음악이 재현한 ‘시민’, 쇼팽이나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재현한 ‘국민(민족)’, 나아가 비틀스의 음악이 재현한 ‘대중’이 그렇다. 물론 여기서 ‘시민’, ‘국민’, ‘대중’은 서로 중첩되는 개념이다. 특히 ‘국민의 음악’이라는 개념은 20세기 이후 민족국가 체제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國歌)나 ‘애국가’를 포함한 공적 음악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 유럽을 지방화하기
이렇듯 공공성과 미적 자율성에 입각한 서양 근대음악의 보편적 개념들이 오늘날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음악적 실천에 스며들어 있지만, 서양음악의 보편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한국을 포함한 비서양 음악문화의 특수성과 고유한 가치를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서양중심주의적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문화상대주의로 무장하여 비서양 문화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것 역시 편협한 시각이다. 서양의 보편성을 인정하되 서양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21세기로의 전환기에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유럽을 지방화하기’(Provincializing Europe)가 그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는 유럽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 방향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로, ‘시민권’이나 ‘개인의 자유’와 같은 유럽적 보편성이 비유럽의 여러 ‘장소’에서 전개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특수성들을 살피는 것이며, 이와 동시에 유럽적 보편성이 유럽이라는 ‘장소’에서 발생하고 전개되는 특수성 또한 관찰하는 것이다. 차크라바르티의 말대로, 그것은 “사상이 ‘장소’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이식’의 관점에서 서양문화의 보편성을 바라보지 않고 ‘장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문화 번역’과 변용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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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창단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의 연주 모습. 국악관현악단은 ‘국악’의 범주에서만 다뤄져왔지만, 현대음악 창작곡 연주를 위해 과감하게 서양식 오케스트라 편성을 도입함으로써 한국음악의 서양화 내지는 ‘서양음악의 지방화’의 한 면모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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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음악에 적용하여 ‘서양음악의 지방화’로 이해해보자. 한반도라는 ‘장소’에서 서양음악은 개화기의 찬송가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가, 근대적 학교에서 불리던 창가와 동요, 거리의 유행가 등과 함께 시작되었다. 서양음악은 한반도의 전통 음악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변용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해방 이후 한국 전통음악의 ‘근대화(현대화)’ 과정에서 서양음악의 개념과 어법, 연주 관습이 개입해온 상황들을 ‘서양음악의 지방화’라는 맥락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예컨대 근대적 연주회장 건물은 전통음악 연행의 맥락을 서양화했으며, 일찍이 1965년에 창단된 서울시국악관현악단과 1995년에 창단된 국립국악관현악단 등은 전통 기악합주를 서양화해왔다. 나아가 ‘창작국악’이라 불러왔던 20세기 이후 새로 작곡된 전통음악 작품들 역시 음악 개념의 서양화를 전제하는 문화적 변용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변용의 과정은 ‘제3세대 작곡동인’(강준일 등으로 대표되었던)의 민족주의적 현대음악과 같은 한국의 특수한 ‘장소성’에 기반한 음악 창작의 토대가 되었다.
창작이 아닌 서양음악 연행에서 ‘장소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한 가지 사례로 2010년 5월에 있었던 광주시립교향악단의 5·18 민중항쟁 30주년 기념 음악회를 들 수 있다. 당시 광주시향의 음악감독이자 지휘자였던 구자범은 상징적인 518명의 ‘시민합창단’(어린이와 아마추어가 포함된)을 이끌고 ‘부활’이라는 부제가 붙은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연주했다. 4악장과 5악장의 독일어 성악 가사는 철학자 김상봉에 의해 번역되어 한국어로 노래 불렸다. 말러에 의한 죽음과 부활의 음악적 서사를 광주 5·18의 서사로 옮기는 ‘문화 번역’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날 광주시향은 ‘광주시민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거대한 악기가 되었고 지휘자는 시민의 목소리를 조율했다. 이날의 특별연주회는 장소성에 기반하여 ‘시립교향악단’의 공공성과 존재 의의를 정치적 맥락에서 드러낸 보기 드문 문화적 사건이었다고 할 만하다.
한편, ‘서양음악의 지방화’는 서양음악의 특수성을 서양음악의 보편적 개념들과 구분하여 다룰 것을 요청한다. 이 점에서 ‘서양음악의 지방화’는 서양 음악문화 그 자체를 지구상의 모든 음악문화와 동등한 ‘지방 문화’로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음악적 공공성의 추구는 서양음악의 보편성에 해당하지만, 실제적인 관현악단 운영과 연주회에서의 규율화된 행동 양식 등은 유럽의 각 지역에서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해온 특수한 문화(들)로서,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문화양식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공성과 미적 자율성에 기반한 서양음악의 보편적 개념이 예술적 발화(發話)의 주체들이 위치한 ‘장소’와 맺는 관계다.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라고 무작정 외우고 대답해야 했던 20세기적 구도에서는 이러한 ‘발화의 위치’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의식하지 않은 채 일종의 유체이탈 화법과 서양인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의 문화를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세방화’(世方化, glocalization)가 화두인 21세기는 다르다. 유럽이라는 장소는 이제 언제든 여행할 수 있고 가상공간에서 실시간으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지방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제 한국인들 자신의 시각으로 세계와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할 때다.
서양을 ‘중심’에 두지 않는 것, 오히려 서양음악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음악을 ‘지방 음악’으로 간주하면서 ‘지방 음악들’ 사이에서 수평적 연대와 공감을 추구하는, 탈중심화한 음악 소통의 민주적 실현이 요청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과 함께 가속화하는 예술적 융합 현상과 함께 이러한 횡단적 보편성은 궁극적으로 음악적 소통을 우리 삶의 일상적 맥락 속에 새롭게 배치할 것을 요구한다. 일상의 모든 대중이 음악적 주체가 되는 것, 그것이 서양 근대의 음악 정신인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호모 무지쿠스’가 실현시킬 미학적 이상이 될 것이다. <끝>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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