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22 18:40
수정 : 2017.06.22 19:29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7) 취안저우(泉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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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핑차오. 1630년 일본 히라도를 떠난 일곱 살의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이곳으로 왔다. 다리 북쪽에 그의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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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요약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여러 이유로 의문이 가시지 않는 그림이다. 박제가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가적인 솜씨가 남아 있어 혹시 청나라의 화가 나빙(羅聘, 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두 사람은 1790년 베이징에서 만나 깊은 교분을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의모도>의 주인공은 쓰러져 가던 명나라의 편에서 청나라에 저항했던 인물 정성공(1624~62)과 그의 어머니였다. 국제무역항이었던 일본 규슈의 섬 히라도에서 태어난 정성공은 1630년 어머니 곁을 떠나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중국으로 간다. <의모도>는 히라도에서 어린 시절의 정성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정성공은 권력과 부를 장악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 역시 1645년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아들이 있는 푸젠성 취안저우로 간다.
도심을 벗어난 버스는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간이정류장에서 젊디젊은 여자들이 갓난아이를 업거나 안고 버스에 자주 올랐다. 한 손을 뻗어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한 채 날렵하게 자리를 잡는 동작이 야물었다. 버스요금을 앞사람에게 건네면 자연스레 운전사에게 전달되거나 양철로 만든 돈 통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놓인 푸른 채소 바구니는 생기가 돌았고 아직 볼이 붉은 엄마는 상체를 돌려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시멘트 가루가 섞인 먼지가 일었고 가끔 ‘성공’(成功)과 ‘연평’(延平)이라 쓰인 간판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림 <의모도>에 쓰인 글자와 같은 것들이었다. 수이터우(水頭)의 시가지에 다가가고 있었다. 버스는 예고도 없이 터미널이 아닌 길가에 멈췄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불만을 말하지도 않았다. 마지막 승객들은 벌써 버스에서 내려 시장 입구를 향해 길을 건너고 있었다. 운전사가 룸미러로 흘겨보며 내리라고 했다. 느닷없는 정전처럼 나만 잠시 얼떨떨해졌다.
길가 가게 앞 파라솔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딱히 이유도 모른 채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나는 방향을 잃었고 일단 숨을 골라야만 했다. 두 병째 먼지가 뽀얀 술병을 들었을 때 헬멧을 쓴 채 오토바이에 납작 엎드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모르긴 해도 그는 내가 버스에서 내리기도 전에 저 자리에 저러고 있었을 것이다. 초봄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다. 나는 서두를 것 없이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 천천히 그에게로 가 어깨를 두드렸다.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중년의 사내가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안핑차오(安平橋)로 갑시다!”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자 곧바로 좁은 골목이었고 오토바이가 요동을 쳤다. 사내는 내가 말한 다리를 모른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었고 나는 가져온 메모지를 들이밀었다. “우리차오(五里橋)구만.” 이들은 그 다리를 그렇게 불렀다. 다리 길이가 5리라고 했다. 우리는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에 들어섰고 운전사는 이 길이 지름길이라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을 막고 누군가는 머리를 감았고 바닷물고기가 널린 발을 피해 핸들을 꺾어야만 했다. 나만 뒷자리에서 흔들거렸을 뿐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내려 걷고 싶은 욕심을 겨우 참고 있을 때 골목의 끝이 보였고 지나온 거리와는 다른 세상처럼 시야가 환하게 넓어졌다. 사내가 헬멧을 벗고 팔을 앞으로 길게 뻗었다. ‘안핑차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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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위안쓰에 정지룡이 봉헌한 향로. 그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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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공 모자의 운명
1630년 일본 히라도(平戶)를 떠난 일곱 살의 정성공은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이곳으로 왔다. 다리 북쪽에 그의 거대한 저택이 있었다고 했다. 정성공은 부유한 권세가 집안의 장남으로 자랐다. 그러나 히라도에 남은 엄마를 잊기 어려웠던지 ‘매일 밤 성공은 어머니가 계신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고 전한다. 십여년의 기다림 끝에 엄마 다가와도 이곳으로 왔고 모자는 드디어 상봉했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어엿한 후계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은 그들과 상관이 없었다.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만주족 청나라의 손에 떨어졌다. 아버지 정지룡은 국운이 다한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투항했다. 청나라의 군대는 빠르게 남진했고 정지룡의 저택은 그들에게 포위되었다. 이미 사태가 절망적임을 직감한 다가와는 스스로 자결을 했다고도 했고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도 했다. 그때 정성공은 이곳에 없었다. 소식을 듣고 돌아온 정성공이 맞닥뜨린 건 어머니 다가와의 주검이었다. 어려서 헤어져 십여년 만에 다시 만나 겨우 1년 남짓이었다. 정성공은 오열했다.
돌로 만든 다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엔 배가 들어오는 만이었다지만 이젠 호수와 습지로 이루어진 공원이었다. 주말이어서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남자 혼자 껍질을 깎은 사탕수수를 손에 들고 걸었고 젊은 엿장수는 발걸음이 급해 보였다. 한가롭고 평온한 오후의 다리에서 오래전 그들을 기억하는 이는 없을 듯했다. 가족 나들이는 걸음이 느렸고 개들은 방정맞게 뛰었다. 쏟아지는 햇살보다 더 눈부신 청춘남녀는 한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떨어진 거리만큼 설렘이 가득해 보였는데 저들은 발바닥으로 돌다리를 기억할지도 몰랐다. 이 다리를 다 걷고 나면 헤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하루종일 다리 위에 머물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늘 아래 아이스크림을 파는 노인이 있었고 마치 예정된 우연처럼 엄마와 어린 아들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푸르른 녹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나는 먼 이국에서 생을 마감한 다가와의 고향집 앞 해변의 바위와 모래와 바다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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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위안쓰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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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와의 불교적 이미지와 나빙
카이위안쓰(開元寺) 앞에 숙소를 잡은 건 순전히 탑 때문이었다.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기 힘들 만큼 까마득히 높은 두 개의 탑은 어디에서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은 탑 사이를 왕복하거나 절 안을 기웃거리는 게 낙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지룡이 이 절에 봉헌했다는, 절만큼이나 거대한 무쇠향로를 마주치기도 했다. ‘부처의 나라’라 불리는 도시에 걸맞게 곳곳이 절이었고 듣기도 처음인 수많은 신들이 모셔진 사당이 말 그대로 즐비했다. 그중에 톈허우궁(天后宮)이 있었다. 도시로 들어오는 옛 관문이었을 강의 선착장과 가까웠다. 궁 안은 온통 붉거나 황금빛이어서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건물 안에서 노인은 작은 나뭇조각을 바닥에 던지곤 몸을 숙여 기도하기를 반복했고 앞에는 부처처럼 모셔진 마조상(?祖像)이 있었다. 히라도에서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기뻐 정지룡이 보냈던 선물이 바로 바다의 여신 마조상이었다.
“취안저우에는 저 절 말고도 수백 개의 좁은 골목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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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의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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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쨋날 카이위안쓰 입구 건너편 높다란 벽 앞에 서서 노을빛을 받아 더욱 붉어진 탑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등 뒤에서 말을 건넸다. 골목 안에서 작은 과자점을 운영하는 리(李)였고 그 뒤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의 가게에 드나들었다. 취안저우의 골목은 다채롭다는 말로는 다 설명이 되지 않을 만큼 풍요로웠다. 맑은 요령소리를 울려대는 두부장수가 있었고 희거나 노란 수선화가 대문 앞이나 담장 위에서 곧 꽃망울을 터뜨릴 태세였다. 때론 골목은 미로처럼 이어져 어느 순간 도로 리의 과자점이 나타나곤 했다. 그는 늘 차와 깨나 김, 또는 알 수 없는 마른 해초가루를 묻힌 과자를 내왔다. 공사 중인 탑 안이 궁금하다는 내 푸념에 리가 탑 내부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재치 넘치는 원숭이 조각들과 모양도 다양한 불상들을 보다가 나는 다시 <의모도> 속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를 떠올렸다.
그림 속 다가와는 ‘불교적’ 이미지를 풍겼다. 마치 ‘반가사유상’처럼, 앉아 있는 자세와 붉은 윗옷 그리고 흰 치마가 그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림을 확대하자 내 의심이 그리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가와의 목에는 불화의 특징 중 하나인 ‘삼도’(三道)와 유사한 목주름이 있었고 귀고리 역시 그랬다. 이렇게 종교적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림은 대상인물에 대한 추모의 성격이 강했다. 어찌된 일일까. <의모도>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박제가가 혼자서 그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의심의 눈초리가 가닿은 인물에 1790년 박제가가 베이징에서 만난 화가 나빙(羅聘, 1733~99)이 있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스스로 출가한 사람이라 여길 정도였다. 불교는 그의 생애를 이끄는 원동력이자 삶의 마지막 귀의처이기도 했다. 다가와의 불교적인 이미지와 나빙…, 둘 사이의 접점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글·그림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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