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3 20:19
수정 : 2017.08.03 20:39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0) 사오싱(紹興)
지난 회 요약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의모도>의 주인공은 명나라가 쓰러져가던 때 남중국의 바다에서 군사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장군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적인 직업화가의 솜씨가 보여 혹시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도 있었다.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여러 차례 만나 깊은 교류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화가 나빙은 1778년 무렵 고향인 양저우를 떠나 남중국의 해안가를 따라 광저우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가 지나던 바닷가 도시인 취안저우에 남아 있는 이슬람 사원은 <의모도>에 그려진 2층의 서양식 건물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광저우는 청나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유일의 해외무역항이었고 그곳을 통해 서양의 그림들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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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난징(南京)에서 우연히 10미터가 넘는 서위의 그림 <잡화도>(雜花圖)를 본 적이 있었다. 실물로 만나는 그의 그림은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더하고 뺄 것 없는 화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메마르고 축축한 그림 앞에서 나는 또 한동안 발목이 붙들렸었다. 믿기 어려운 기량과 높은 격조로 보는 이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림도 있지만, 도무지 불감당의 격정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다. 기쁘다고 늘 웃는 것만은 아니다. 울기도 한다. 난징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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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나는 이곳 사오싱에 처음 왔었다. 몇 명의 동행이 있었고 합의된 여정이 따로 있지 않았지만 소설가 루쉰(魯迅)의 고향인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난생처음 겪는 더위였다. 시내버스를 타고 도시 남쪽에 있다는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을 찾아갔고 푹 삶은 시금치가 되어 돌아왔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도 거리는 열탕이었다. 수로와 인접한 뒷골목을 걷다가 제법 세월의 때가 묻어나는 ‘룽샤’(龍蝦, 민물가재) 전문점을 발견했다. 여럿이었으므로 용기는 필요 없었다. 우렁찬 목소리마저 열기를 더했고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타고 음식이 날라져 왔다. 붉은 기름 위로 기름보다 더 붉은 민물가재가 집게발을 내밀었다. 붉은 사오싱주(紹興酒)의 밤이었다. 하루는 별것 아닌 일로 심사가 틀어져 혼자 남았다. 아열대의 여름 거리는 태양 볕과 그늘이 칼날 같았다. 루쉰의 골목이나 가볼까 하고 별생각도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팻말이 ‘청등서옥’(靑藤書屋)… ‘푸른 등나무’라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불꽃 같던 서위의 그림
고즈넉했다. 정갈한 흙 마당을 지나자 담 아래 연못이 있었고 무성한 등나무가 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연못 속에 물고기 몇 마리, 명나라의 화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했던 서위(徐渭, 1521~93)의 집이었다. 그의 그림과 글씨는 자유롭다 못해 거침없고 분방하고 때론 격렬해서 겨우 거실만한 전시장 안에서 자주 걸음이 멈칫거렸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곧 종이에서 부서져 내릴 듯 메마른 나뭇가지와 물기가 흥건해 손을 대면 축축이 젖은 잎사귀가 만져질 것만 같은 그림들. 폭발하는 감정들이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졌고 먹물은 무방비로 달아나 이리저리 튀었다. 적나라한 감정들의 속살 앞에서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 마당에 어른거리는 푸른 파초의 그림자는 고요했고 늙은 석류나무에서 떨어져 내린 붉은 꽃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불꽃 같았다. 그의 그림 같았다. 돌연 명치를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등불을 돋우고 원굉도의 <서문장전>(徐文長傳)을 읽었다.’
스무 살의 박제가가 묘향산 여행기에 남긴 구절이었다. 서문장은 서위를 말했다. 오래전 <의모도>를 처음 본 순간 찾아들었던 강렬한 의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희미해졌고 때론 잊었다. 그럴 때 이 구절을 만났다. 얼마간 나는 책장을 넘기지 못했고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그림 <의모도>를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그가 <서문장전>을 읽던 어느 새벽을 떠올렸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짐 꾸러미에 어떤 책을 넣을까 즐거운 고민에 빠졌을 박제가를 상상했다. 그것도 어쩌면 책을 빌려다 베껴 쓴 필사본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원굉도의 것이었으며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서문장전>을 읽던 새벽의 순간을 글로 남겼던 것일까. 스무 살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이 구절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의모도>를 찾아나설 결심은 좀 더 미뤄졌을 것이다. 서위도 그렇지만 원굉도(袁宏道, 1568~1610) 역시 당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문제적 인물이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박제가의 글에서 만났다.
나빙은 가장 나이 어린 ‘양주팔괴’였다. 그들은 자주 서위의 분방한 붓질을 자신들의 그림에 끌어들여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감추지 않았고 나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양저우의 화가들과 나빙에게로 서위의 격정이 흘러갔다. 그 격정은 단순히 ‘붓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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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사오싱 골목의 풍경은 지난겨울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었다. 두꺼운 외투와 털 벗은 오리와 반으로 갈라 펼쳐진 물고기들이 함께 햇볕에 마르고 있었다. 입김처럼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신상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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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의 독창성의 근원, 양명학
기존의 이론을 빌려 말하면 서위나 원굉도는 그림이나 글의 창작에 있어서 유독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경향에 몰두한 자들이었고 그 근원을 따라가면 ‘양명학’(陽明學)에 닿았다.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양명학은 배척되거나 금기어에 속했다. 인기 없는 학문이 아니라 배워서는 안 되는 이단의 학문으로 취급되었다. 박제가보다 아래 세대인 홍한주는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서위나 원굉도 등의 무리들은 자질구레한 문체로 점점 망국의 문장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읽은 박제가 역시 주자학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사대부 지식인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학문적인 호기심이었을까.
봄이 오는 사오싱 골목의 풍경은 지난겨울의 시간을 압축해 보여주었다. 두꺼운 외투와 털 벗은 오리와 반으로 갈라 펼쳐진 물고기들이 함께 햇볕에 마르고 있었다. 입김처럼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곧 청등서옥에 닿을 것이다. 이곳으로 올 때면 늘, 처음 그의 그림과 글씨에서 받았던 당혹스러움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했다. <의모도>처럼 여러 상징이 들어찬 ‘읽는 그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한눈에 들어오는 파초와 각종 꽃들, 눈 내린 대나무와 비에 젖은 바위… 그동안 보아온 것들과 별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껏 내 관념 속에 남아 있었을 그림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웠는데, 그건 아마도 감정이나 정서에 속한 문제와 맞닿아 있을 듯했고 또 그가 자연 혹은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 보였다.
몇 해 전 난징(南京)에서 우연히 10미터가 넘는 서위의 그림 <잡화도>(雜花圖)를 본 적이 있었다. 우연이었겠지만 나빙의 오랜 친구 옹방강의 감상이 글로 남아 있었다. 알려진 그의 서체와는 아주 다른, 기분에 취해 한껏 풀어진 글씨였는데, 그건 아마도 서위의 그림에서 받은 감흥을 주체 못한 그의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읽었다. 실물로 만나는 그의 그림은 마치 어제 그린 것처럼 더하고 뺄 것 없는 화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메마르고 축축한 그림 앞에서 나는 또 한동안 발목이 붙들렸었다. 믿기 어려운 기량과 높은 격조로 보는 이를 숨 막히게 만드는 그림도 있지만, 도무지 불감당의 격정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그림도 있었다. 기쁘다고 늘 웃는 것만은 아니다. 울기도 한다.
내가 <의모도>에 품었던 의문에 화가 나빙에 대해 힌트를 준 이는 미술사학자 이동주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라는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청나라의 이선(李?)을 좋아한다. 그리고 왜 이런 양주팔괴류(揚州八怪流)의 일취(逸趣)가 우리에게 드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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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싱의 수로 풍경. 신상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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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의 격정이 나빙에게 흘러갔다
이선은 청나라가 융성했던 시절 양저우(揚州)를 대표하는 화가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들을 ‘양주팔괴’라 불렀다. ‘괴이하다’(怪)고 할 만큼 그들의 그림은 각자의 개성으로 충만했다. 사소한 것이 화면으로 들어왔고 때론 더없이 화려해 눈이 부셨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격조도 없이 돈밖에 모르는 그림장사꾼에 불과했지만 또 다른 부류들은 친숙하고 눈을 사로잡는 이들의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이쪽과 저쪽의 가치가 그림 안에서 격렬히 부딪혔고 창작의 길은 사방으로 분산되었다. 바로 나빙의 고향이 양저우였고, 그는 가장 나이 어린 ‘양주팔괴’였다. 그들은 자주 서위의 분방한 붓질을 자신들의 그림에 끌어들여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감추지 않았고 나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양저우의 화가들과 나빙에게로 서위의 격정이 흘러갔다. 그 격정은 단순히 ‘붓질’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청등서옥의 뒤꼍에 작은 돌우물이 있었다. 나는 박제가를 비롯한 백탑파의 글들과 어떤 행위들, 또 서위와 나빙과 양주팔괴들의, 때론 ‘자질구레’하고 때론 치졸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림들에서 오히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의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걸 가벼움이나 발랄함이라 불러도 상관없었고 또 격정의 끝 저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을 고독이라 말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글과 그림들이, 어쩌면 오랜 시간 자신들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바깥에서 들어와 돌처럼 굳어진 고정관념에 뿌리내린 것들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는지도, 그래서 스스로 초라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우물 아래를 내려다봤다. 깊은 어둠 속에서 물은 수은처럼 빛났다. 어쩌면 그들은, 남들보다 여리고도 좀 뜨거운 심장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빙과 박제가의 대화 목록에 서위의 이름을 올렸다.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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