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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9.07 18:52 수정 : 2017.09.07 20:10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 앞 전문의 모습. 이 근처에 박제가가 머물던 조선사신관이 있었다. 신상웅 제공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2) 베이징(北京) 1

만약 <행락도>를 나빙이 그린 것이라면 왜 <의모도>의 주인공을 어머니 다가와로 삼았는지 짐작이 가기도 했다. 이미 눈앞에 살아 있는 인물을 보고 그린 <정성공초상>을 보았고 그것을 토대로 <행락도>를 그렸다면 더 이상 ‘어른’ 정성공은 그릴 이유가 적었다. 나빙이 적대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만주족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인들, 그녀들 모두에게 바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린’ 정성공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중국 베이징 천안문광장 앞 전문의 모습. 이 근처에 박제가가 머물던 조선사신관이 있었다. 신상웅 제공

지난 회 요약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명나라 말기에 남중국의 바다에서 세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인물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였다. 하지만 박제가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적인 화가의 솜씨가 있어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다. <의모도>에서는 나빙의 그림과 유사한 흔적이 보이곤 했다.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여러 차례 만난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세상의 새로운 소식에 민감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또 나빙에게는 청나라에 의해 목숨을 잃은 조부모가, 박제가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못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의모도>에 대한 의문의 시작은 이곳 베이징일 수밖에 없었고 어느 곳보다도 먼저 이리로 왔어야 했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 탑골공원 백탑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도, 정성공이 태어난 일본 히라도의 바다와 또 나빙의 옛집이 있는 양저우를 자주 드나들면서도 베이징행은 늘 뒤로 밀렸다. 가야 할 이유가 분명한데도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내키지 않는,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래도 가끔,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듯 밤늦게 모니터를 켜고 화면으로 들어가 나빙과 박제가가 자주 만났던 베이징 유리창(琉璃廠) 골목을 훔쳐봤다. 그들이 오갔을 길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어느 날은 지름길로, 또 어느 날은 일부러 먼 길을 에둘러 갔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가상의 현실감은 곧 사라졌고 내게 베이징과 유리창 거리는 실체가 없는 신기루로만 여겨졌다.

#나빙의 거처, 관음각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했다. 박제가가 베이징에 와 있던 1790년 나빙의 거처였다. 나빙은 그림을 그리고 나면 늘 그린 장소를 적었다. 후원자의 별장 이름을 썼고 누군가의 집이 있던 골목이나 때론 절에서도 그렸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바로 유리창 거리의 관음각이었다. 나빙이 박제가를 위해 초상화를 그리던 곳, 나는 어쩌면 그곳에서 <의모도>가 그려졌을 것만 같았다. 베이징에 오기 전 미리 연구자들의 책에서 관음각의 사진을 보았고 주소를 옮겨 적었다. 이름은 좀 달랐지만 ‘호국관음사’(護國觀音寺)라는 글씨가 선명한 그 자리는 유리창 동쪽 거리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골목 모퉁이였다. 낡고 초라했다. 자물쇠도 없는 허름한 나무문은 자주 닫혀 있었고 어떨 땐 반쯤 열린 채 덜컹거렸다. 제집처럼 불쑥 안으로 몸을 디밀었다. 쪽방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마당이랄 것도 없는 뜰이 나타났고 고장 난 자전거며 허물어진 벽을 뚫고 나무가 자라나 있어 도망치듯 빠져나오곤 했다. 그래도 그 앞을 지날 때면 어쩔 수 없이 걸음이 느려졌고 낮은 헛기침이 나왔다.

유리창에서 가까운 후퉁(胡同, 골목) 안쪽에 숙소를 잡고 느긋했다. 오전에는 숙소의 젊은 직원들과 노닥거렸고 다 늦은 오후에 유리창 거리로 가 이제는 옛 명성을 찾아볼 길 없는 서점들과 골동품 가게에 들어가 기웃거렸다. 조선의 사신들이 베이징으로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명목상 자금성을 드나들거나 황제를 배알하고 국서를 전달하는 일이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온통 유리창으로 쏠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박제가도 그랬다. 당시 세상의 거의 모든 지식과 문화와 오락과 지식인들이 들먹거리던 곳이 유리창 거리였으니 박제가가 나빙을 이곳에서 만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이젠 그 자리를 관광 상품이 차지했고 하루 한 건이면 족할 호객꾼들이 은밀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옆구리를 툭 쳤다. 그래도 서점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그림책이 무궁무진해 하루가 짧았다. 나는 ‘호국관음사’ 앞을 지나 지하철을 타고 국가도서관을 가거나 더 멀리 대학도서관으로 가, 책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지식의 창고는 시대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사찰 창춘쓰 주변에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은 과거부터 이곳에 책과 그림을 파는 시장이 섰다는 것을 알려준다.

#잘못 알려진 관음각의 위치

‘소의 거리’(牛街)를 찾은 건 이슬람 사원을 보기 위해서였다. 잡초가 자란 기와지붕을 보며 남쪽 바닷가 도시 취안저우의 이슬람 사원 칭징쓰(淸淨寺)의 돌기둥과 둥근 지붕을 떠올렸다. 가까운 절 창춘쓰(長椿寺)에도 갔다. 자금성과 가까운 내성(內城)에 거주할 수 없었던 한족들이 이 지역에 몰려 살았다. 나빙이 베이징에 머물던 당시에 큰 시장은 절을 중심으로 열렸다. 책과 그림뿐만 아니라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고 조선에서 온 사신들도 절에서 서는 시장을 찾아 숙소를 빠져나갔다. 나빙도 이곳 창춘쓰에 장이 서는 날을 골라 그림을 팔러 오곤 했다. 그는 매화를 잘 그렸고 많이 그렸다. ‘매화를 그려 쌀을 구하다’(畵梅乞米)라고 도장을 새겨 스스로 웃었다. 온갖 눈요깃거리들이 넘쳐났을 사찰은 넓고 한적했다. 사람들의 동상이 있었고 그때의 일들이 무료하게 재현되었다. 근처에 살던 이름난 자들의 집들이 지도 위에 어수선했는데 그곳에, ‘나빙의 옛집’이 보였다. 그런데 지금껏 내가 하루에 한 번은 스쳐 지나가던 ‘호국관음사’가 아니었다. 나빙과 박제가가 만났던 ‘관음각’은 그 자리가 아니었다.

유리창 동쪽 거리가 끝나기 전 화신묘(火神廟)가 보였고 건너편이 관음각이 있던 자리라고 했다. 지금은 작은 화랑과 종이와 붓을 진열해 놓은 상점이 있는 저곳 이층의 누각 안에 관세음불상이 모셔져 있어 관음각이라 불렀다는 것. 누각 아래는 골목으로 들어가는 통로였고 그 안쪽에 큰 사찰이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정보를 종합해보면 ‘관음각’은 이층짜리 누각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누각에서 골목으로 이어지는 지역을 부르는 명칭이기도 했다. 나빙은 박제가가 베이징에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 이곳 유리창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여름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숙소를 나와 관음각으로 향하던 길에서 ‘눈이 빙빙 돌’ 만큼 많은 책에 넋이 나간 박제가가 있었고, 또 이 거리에서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 선양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기록을 베껴 적는 또 다른 박제가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수많은 만남과 이야기들…. 지난 과거의 어떤 장소는 때로 깊고 긴 여운을 주지만 또 돌이키기 어려운 실망과 쓸쓸함을 던지기도 했다. 이제 ‘관음각’은 현실에 없었다.

박제가를 포함한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를 방문해 지식문화를 접하길 원했다. 박제가와 각별한 사이였던 학자 기윤(紀?)은 당시 지식의 총화였던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집자였다. 양저우 톈닝쓰(天寧寺) 소장.

#무참히 죽은 여인들에게 바치려 다가와를 주인공으로

누가 뭐래도 정성공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의모도>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와 나빙의 증조모와 열두 명 여인들의 삶이 가벼워서가 아니다. 역사로 남은 기록이 그랬다. 그중에서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실을 끄집어내 그림으로 눈앞에 보여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모도>는 값지다. 그래도 다가와를 그림의 주인공으로 선택한 것은 낯설고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내 생각은 다시 샤먼의 정성공기념관에서 보았던, 화가의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은 그림 <정성공행락도>에로 미쳤다. 그림 곳곳에서 느껴지던 나빙의 스타일들. 만약 <행락도>를 나빙이 그린 것이라면 왜 <의모도>의 주인공을 어머니 다가와로 삼았는지 짐작이 가기도 했다. 이미 눈앞에 살아 있는 인물을 보고 그린 <정성공초상>을 보았고 그것을 토대로 <행락도>를 그렸다면 더 이상 ‘어른’ 정성공은 그릴 이유가 적었다. 나빙이 적대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만주족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여인들, 그녀들 모두에게 바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어린’ 정성공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면 천천히 걸어 천안문광장 앞 전문(前門)으로 갔다. 목적지는 늘 같았지만 가는 길은 조금씩 달랐다. 어느 길에선가 박제가의 걸음과 마주치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이 근처에 조선사신관이 있었다. 육중한 제국의 문 앞은 늘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모를 것들이 느리게 떠다녔다. 고백하건대 뿌옇게 가로막힌 시야처럼 결국 <의모도>의 의문에 나는 한걸음도 접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가정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었고 정말 박제가가 그린 것이라면 어째서 그림이 베이징에 남은 것인지, 또 그림의 주요 부분을 나빙이 그렸다면 왜 박제가가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인지 뒤엉킨 실타래는 의문만 남겼다. 그저 가정법의 위태로운 사다리를 타고 <의모도>로 접근하는 모양새였다. 그러고도 남는 마지막 질문. 왜 하필 정성공의 이야기여야 했던 것일까.

<의모도>의 실체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지금껏 나를 떠나지 못하는 내 그림자였다. 하지만 이 여정이 질문의 해소에 대한 이야기가 되리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림이 지닌 의문을 따라갔지만 내 깊은 곳에는 1790년의 시간과 베이징이라는 공간을 마주한 나빙과 박제가 두 사람의 복잡한 심사 한 자락을 엿보고 싶다는 불가능한 속셈을 품었다. 실패는 예정된 결과였다. 불투명한 추정과 <의모도>가 지나던 과거의 어중간한 자리를 끊임없이 맴돌다 제풀에 나자빠질 운명. 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걸 내 눈으로 확인하러 와야 하는 베이징행은 그래서 난감했다. 하지만 ‘실패’와 ‘불가능’을 확신하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불안한 뒷모습 어디쯤 나빙과 박제가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들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제국의 정문 앞으로 낡을 대로 낡은 늙은이의 자전거가 지나갔다. 풍경도 사람도 모두가 숨이 막혔다.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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