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19 19:58
수정 : 2017.10.19 21:01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4) 산하이관(山海關)
나는 그 먼 길을 걸어 당도한 천하제일관 아래에 서서 기가 질리도록 높고 육중한 벽을 바라보았을 박제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의 ‘실학’의 이미지는 저 벽돌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벽돌을 보며 자신이 닦아온 학문의 유용함과 합리성의 실체를 고민했을 것만 같았고 또 조선의 선비로서 남한산성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산하이관의 문이 안으로부터 열리던 날 제국의 심장으로 진입하는 청나라의 말발굽 소리에 병자호란 뒤 인질로 잡혀 온 소현세자가 있었다는 것을 박제가는 모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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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축조한 만리장성의 4대 관문 중 하나인 산하이관은 화북지방과 동북지방을 잇는 요충지이자 제1관문으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불리기도 한다. 신상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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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요약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은 명나라 말기에 남중국의 바다에서 세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인물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였다. 박제가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화가의 솜씨가 있어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다.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여러 차례 만난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많았다. 세상의 소식에 민감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극적이었다. 나빙에게는 청나라에 의해 목숨을 잃은 조부모가, 조선의 선비 박제가에게는 병자호란의 치욕이 있었다. 그림을 팔기 위해 아내의 부음을 듣고도 나빙은 베이징을 떠나지 못했고 박제가는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베이징으로 와야만 했다.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며 매화그림과 초상화를 선물했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박제가는 나빙을 그리는 시를 써서 남겼다.
꼭 한번은 와보고 싶었다. 스스로 지원을 했든 아니면 내키지 않는 걸음이었든 조선을 떠나 제국의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문. 문 안쪽의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이었겠지만 문밖 사람들에게는 이유 모를 치욕을 안겨주던 편견과 차별의 경계. 경계선의 밖은 그냥 오랑캐의 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조선의 선비 누구에게는 한번은 넘고 싶었던 곳. 저 문을 지나야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만 같았던 기대와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동시에 품게 하던 그런 곳. 이곳 산하이관이 내겐 그래 보였다.
나도 조선에서 온 그들처럼 성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조선의 사신단이 통과해야 하는 문은 네모꼴의 산하이관 성 동쪽이었다. 예전에는 밖에서 온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여서 웅성거렸을 성문 앞은 이제 그저 너른 주차장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관문의 웅장한 규모와 고압적인 자세는 누구든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곳곳에서 꿀꺽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법했다. 짙은 회색의 장막처럼 늘어선 성벽이 까마득히 산으로 이어졌고 성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문을 겹겹이 둘러싼 옹성의 문들을 지나야만 했다. 요새의 안전장치는 치밀하고 빈틈없었다.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하이관
성벽 위로 누각의 지붕이 보였고 그 아래로 마치 긴 동굴을 닮은 통로가 나타났다. 천천히 걸어 그들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돌길은 닳아 기름을 칠한 듯 윤기가 흘렀고 서른여덟 걸음 만에 긴 어둠이 끝이 났다. 참았던 호흡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문이나 동굴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기 위한 제의처럼 걸음걸이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시곗바늘이 불규칙하게 돌 것만 같았다. 규모에 시간이 더해져 눈과 이성을 교란했다. 정교하게 쌓아올린 긴 궁륭은 거대한 짐승의 입천장을 닮아 마치 제국의 심장부로 통하는 짐승의 아가리를 지난 기분이었다. 입구를 지났고 광장의 중심으로 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회색의 벽이 추상화와 방불했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살짝 몸을 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제국의 황제는 이곳 천하제일관 아래 긴 어둠의 동굴 한 곳만을 남겨둔 채 밖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닫았다. 이 거대한 벽을 인간의 힘으로 세운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어떤 인위적인 힘으로도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자신감과 두려움으로 쌓아올린 난공불락의 요새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했을 것이다. 겹겹의 성곽으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할 것만 같았던 산하이관의 문은 그러나 안에서 스스로 열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대륙의 운명이 바뀌었다. 명나라의 황제는 스스로 목을 맸고 베이징의 주인은 만주족 청나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빙의 고향 양저우의 불길 속에 그의 증조모가 있었고 정성공의 어머니 다가와의 죽음이 이어졌던 것. 이곳 산하이관의 문이 열리면서 거대하고 부패한 제국의 둑이 터졌고 둑을 넘은 홍수의 격랑 속에 그녀들의 불행이 묻혔다. 대륙을 쓸고 내려간 파국의 물결을 겨우 버티어 막고 있던 인물이 바로 정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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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하이관의 ‘라오룽터우’는 만리장성의 시발점이다. 신상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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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중한 벽 앞에 선 실학자 박제가
‘천하제일관’을 동문으로 둔 장방형의 요새를 네 등분 한 가운데에 이층의 누각이 있었고 누각 아래에 서면 사통팔달의 길이 곧고 훤했다. 안과 밖을 나눈 경계의 성벽은 북쪽 자오산(角山)으로 향했다. 북문을 나서자 길은 산 아래 시골마을로 이어졌다. 성곽의 허리를 뚫고 고속도로가 동서로 내달렸고 어쩌다 황금빛 마차와 쌍봉낙타가 지나갔고 밭에서는 말똥냄새가 진동을 했다. 성안에서 멀쩡하던 성벽은 이제 상처 입은 용의 등처럼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고 그 틈으로 오솔길이 나 성 밖의 사람들과 개와 염소 떼가 드나들었다. 성벽에 오르자 반대편은 아찔한 계곡이었다. 벽은 자오산에서 흘러내린 물길을 따라 세워져 불규칙하게 출렁거렸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적들을 막으려 쌓아올린 길고 긴 방어벽은 거대한 용의 형상으로 산등성이를 향해 오르거나 남쪽 바다를 향해 대가리를 세우고 미끄러지듯 아래로 내달렸다.
무너진 흙더미의 성 위에도 꽃이 피었고 나무가 자랐다. 허물어진 벽돌의 성벽이 있었고 나는 그 먼 길을 걸어 당도한 천하제일관 아래에 서서 기가 질리도록 높고 육중한 벽을 바라보았을 박제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의 ‘실학’의 이미지는 저 벽돌로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는 이곳에서 벽돌을 보며 자신이 닦아온 학문의 유용함과 합리성의 실체를 고민했을 것만 같았고 또 조선의 선비로서 남한산성의 비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산하이관의 문이 안으로부터 열리던 날 제국의 심장으로 진입하는 청나라의 말발굽 소리에 병자호란 뒤 인질로 잡혀 온 소현세자가 있었다는 것을 박제가는 모르지 않았다. 벽돌은 벽돌이고 성벽은 성벽일 뿐이었지만 그 이율배반의 성문 아래를 네 차례나 들고 나던 그의 발걸음의 무게를 헤아리는 일은 난감했다.
#나빙과 박제가의 마지막
장성은 남쪽으로 달려 바다 안으로 진격하면서 끝이 났다. 산과 바다 사이를 막아 ‘산하이관’(山海關)인 것이었을까. 이곳도 짓고 무너지기를 반복했는지 수백 년 시간의 흔적이 퇴적암처럼 명확했다. 물에 잠기는 성벽의 마지막은 벽돌이 아니라 직각으로 다듬은 돌이었다. 마치 바다로 진군하려는 군함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적의 침입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마치 자오산에서 천하제일관을 거쳐 바다에 다다른 늙은 용을 보는 듯했다. ‘라오룽터우’(老龍頭), 이름 그대로였다.
모래 해변을 지나 멀지 않은 곳에 신들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이름도 다양한, 바람과 파도를, 비를 관장하는 신들이 비좁게 도열했다. 천둥의 신에서부터 천 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신까지, 그러니까 바다와 항해에 관한 거의 모든 신의 집합소였다. 그 안에 ‘마조상’(?祖像)이 빠질 리 없었다. 바로 일본의 히라도에서 아들 성공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정지룡이 기뻐 보낸 선물인 바다의 여신 마조상. 정지룡 자신처럼 아들 성공 역시 바다에서 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긴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곳이 남중국의 바다였으니 피해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바다의 길을 따라 이곳까지 여신들의 영험이 미쳤다.
1790년 베이징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던 박제가는 산하이관에 묵었다. 그러곤 만리장성의 동쪽 끝,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바다를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이곳에 걸음을 했었나 보다. 그는 나빙과 헤어져 떠나오면서 ‘넋이 나간 듯 꿈결인 듯 눈물’만 흘렸다고 썼다. 그러곤 다시 ‘라오룽터우’ 옆 바닷가 정자에 올라 나빙을 그리는 시를 또 남겼다. 그럴 수 있다면, 바다의 물결을 따라 나빙의 집이 있는 양저우로 가고 싶다고, 쓸쓸히 적었다. 박제가와 헤어진 나빙도 곧 고향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베이징을 떠나지 못했다. 그 뒤 몇 년이 더 지난 1798년 8월 양저우로 돌아갔고 이듬해 여름 숨을 거둔다. 그런 사실을 알 길 없었던 박제가는 1801년에 마지막으로 베이징에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빙의 부음을 들었다. 박제가는 제를 올리고 곡했다. 그것이 우연히 베이징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두 이국의 사내들의 마지막이었다.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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