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02 19:43
수정 : 2017.11.02 20:32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5) 종성
흰머리가 늘었고 젊어서 타오르던 열망도 재처럼 가라앉았다. 때론 말을 타고 멀리 술집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타향에서 보는 살구꽃도 반가웠다. 그렇게 그는 저곳에서 4년의 시간을 누르고 살았다. 나는 지금 북방의 작은 마을 종성이 바라다보이는 이 강가에서, 서울 남산 자락과 혜화동 어디쯤 있었다는 박제가의 집보다 오히려 그의 생을 더욱 실감했다. 멀리 티베트의 황량한 민둥산과 다를 바 없는 마을 뒷산과 강물 사이의 좁은 들 안에서 그는 울고 웃고 서성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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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광유쓰(광우사)에서 바라본 백탑(왼쪽 뒤편). 멀리서도 백탑은 우월했다. 저보다 빛나고 세련되고 한층 교태를 부린 빌딩들 사이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자존감을 보였다. 사진 신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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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 요약
<연평초령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은 명나라 말기에 남중국의 바다에서 세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인물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였다. 박제가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화가의 솜씨가 있어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다. 1790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여러 차례 만난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세상의 새로운 소식에 민감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며 매화 그림과 초상화를 선물했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박제가는 나빙을 그리는 시를 남겼다. 1801년 다시 온 베이징에서 박제가는 나빙의 부음을 듣고 곡했다. 서울로 돌아간 그를 기다리는 건 북방 종성으로의 유배였다.
멀리서도 탑은 우월했다. 저보다 빛나고 세련되고 한층 교태를 부린 빌딩들 사이에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자존감을 보였다. 옅은 잿빛과 갈색이 감도는 팔각 13층의 위용만으로도 독립적이었다. 시간의 힘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압록강을 건너고 몇 개의 고개를 넘어 드디어 가뭇없는 요동의 벌판에 도달했을 때 눈앞에 나타난, 높이가 수십 미터에 육박하는 랴오양(遼陽)의 백탑은 박제가에겐 세상에서 단 하나의 풍경이 되었을 법했다. 그는 서울의 백탑을 떠올렸을까. 마치 먼바다를 건너 제국의 항구로 이끄는 등대와 같았을 탑의 모서리마다 풍경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종소리가 요동의 벌판으로 퍼져나갔다고 했다. 들판의 자연이 만든 아득한 수평선을 거슬러 오로지 저 혼자 하늘로 솟은 거대한 돌출은 그대로 부조화의 경이로움이었을 것이다. 기어이 제국의 안쪽으로 다가간다는 실감. 풍경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탑신의 처마에서 비둘기들이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한바탕 울 만한 자리, 백탑
광유쓰(廣佑寺·광우사)는 과장과 과욕으로 경내를 채웠다. 절 문 앞 패방(牌坊)과 향로와 불상은 모두 세계 최대였고 결국 자금성보다 못할 것도 없는 대웅전의 화려함 앞에서 그만 방향을 잃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간절한 눈빛과 몸짓으로 오체를 투지했고 어린 손녀의 손을 잡은 노인은 한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탑 쪽을 바라보았다. 그도 탑 같았다. 저 백탑이 아니었어도 나는 오래도록 이곳 요동의 들판을 그려왔다. 1778년 박제가가 처음 이곳을 지나 베이징을 다녀와서 남긴 <북학의>의 서문은 연암 박지원이 썼다. 이태 뒤 박지원도 이 자리에 섰다. 그러곤 저 백탑과 요동의 들판을 바라보며 “한바탕 울 만한 자리”라고 했던 이곳. 그 자리에 서면 그 울음의 속내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까. 하여 나도 언젠가는 내 울음을 쏟아놓을 자리를 만나고 싶다고 늘 소망했다. 또 그 자리가 어느 한곳이 아니라 둘이나 셋이면 더 좋겠다고 욕심냈다. 때론 그곳이 풍경만이 아니라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나중이었다. 그래서 울음의 자리는 장관의 풍경이 아니라 삶의 심연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라고, 울음은 웃음과 같은 의미였을 거라 믿었다. 어쩌면 박지원과 박제가 두 사람의 눈길은 탑과 들판을 지나 더 먼 곳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박제가의 유배지를 찾아
기차는 북으로 달렸다. 랴오양의 백탑에서 내처 단둥(丹東)으로 가 푸른 압록강 너머 의주를 보려고 했었다. 아마 박제가처럼 강을 건너 평양을 지나 서울로 갈 수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여자의 이름은 춘화라고 했다. ‘봄의 꽃’, 그녀가 찻잎을 넣어 삶은 계란을 내밀었을 때 나는 조금 웃었다. 조선족이라는 그는 “나는”이라고 말하지 않고 “내는”이라고 말했다. 볏짚을 태운 검은 재와 잔설의 흰 얼룩이 논바닥에 추상화를 그렸다.
1801년 마지막으로 베이징을 다녀온 박제가는 곧바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유배를 떠났다. 그해 9월 서울을 떠나 원산을 지나고 함흥에 묵었다. 그는 지나는 길목마다 시를 썼다. 다리에 종기가 덧났고 홍시를 사 먹었고 지나온 시절을 곱씹었다. 목이 메었다. 박제가는 북으로 걸었다. 춘화씨는 옌지(延吉)를 지나 훈춘(琿春)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함경북도 종성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니, 종성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이라고 해야겠다. 박제가의 유배지였다. 삼십 분마다 기차 밖의 온도는 1도씩 내려갔다. 눈만큼 하얀 자작나무가 군데군데 군락을 이뤄 겨울의 끝자락을 견디고 있었다. 대륙의 남쪽에서 봄을 따라 북상하던 나의 길은 봄의 속도를 따돌리고 겨울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북방의 늦겨울은 예상보다 푸근했다. 국경의 버스 안에서는 중국말보다 억센 함경도말이 더 빨리 귀에 날아와 박혔다. 들처럼 넓은 과수원이 연이어 나타났다. 사과였다. 종성으로 간다는 나에게 봄에 룽징(龍井)의 사과나무밭을 와보라고, 꽃이 얼마나 장관인지 얼굴에 이미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춘화씨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고 황태덕장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멀리 나무들 사이로 흰 강줄기가 보였다. 두만강이었다. 버스는 강물과 나란한 길을 따라갔다. 강변 나무의 우듬지 아래까지 휘어진 잡풀들이 까치집처럼 걸려 있었다. 지난여름 물난리의 흔적이라고, 불어난 물이 바다와 같았다며 남한의 충청도 어디에서 담뱃잎을 따 돈을 벌었다는 노인이 일러주었다. 강물이 길과 가까웠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흰 팻말이 지나갔다. 저기였다. 춘화씨가 알려준 마을, 촨커우(船口)였다. 운전사에게 달려갔다. 나 내려요. 버스가 멀어져갔다. 창문에 손바닥을 댄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유배지에서야 그의 삶을 실감했다
박제가가 한 달을 넘게 걸어 도착한 종성의 가을은 추웠다. 이대로 북방의 강마을에서 늙어버릴 것 같았다. 하루가 일 년 같은 유배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해가 저물었고 아침이 왔다. 견뎌야 하는 시간만 남았다. 자신의 생일을 혼자서 맞았다. 서러운 날이었다. 술과 만두가 먹고 싶었다. 서울의 자식들에게 부치지 못하는 시를 썼다. 그래도 살아있는 목숨이어서 살아야 했다. 울타리 아래 텃밭을 만들어 상추를 심었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때론 집에 머물며 같이 잠을 자기도 했다. 일상처럼 시를 지었다. 종이가 귀해 자작나무 껍질에 메모를 했다.
해가 바뀌었다. 홀로 앉은 새벽의 밥상은 여전히 눈물겨웠다. 머리 기른 승려와 다르지 않았다. 정월 초이레, 인일(人日)이었다. 전설에서 창조의 신 여와(女?)가 먼저 동물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사람을 만들었다는 그날은 나빙의 생일이기도 했다. 세 번째 베이징에 머물던 1791년 겨울 박제가는 나빙의 생일을 맞아 시를 짓고 맘껏 취했다. 10년 뒤 다시 찾은 베이징에서 그의 부음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해 서울로 돌아온 그를 기다린 건 먼 유배였다. 그리고 겨울의 북방 유배지에서 다시 찾아온 나빙의 생일. 벗이 없는 세상의 봄은 아팠다.
겨울의 두만강은 을씨년스러웠다. 촨커우에서 보는 강 건너 종성은 멀어 선명하지 않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강가를 배회했다. 마을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까지 강둑을 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박제가는 조금씩 평정을 되찾았다. 흰머리가 늘었고 젊어서 타오르던 열망도 재처럼 가라앉았다. 때론 말을 타고 멀리 술집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타향에서 보는 살구꽃도 반가웠다. 그렇게 그는 저곳에서 4년의 시간을 누르고 살았다. 나는 지금 북방의 작은 마을 종성이 바라다보이는 이 강가에서, 서울 남산 자락과 혜화동 어디쯤 있었다는 박제가의 집보다 오히려 그의 생을 더욱 실감했다. 멀리 티베트의 황량한 민둥산과 다를 바 없는 마을 뒷산과 강물 사이의 좁은 들 안에서 그는 울고 웃고 서성였을 것이다. 멀고 먼 낯선 곳으로의 유배는 최대치의 고독을 강요하는 형벌이었다.
옌지시에서 머무는 동안 박제가의 글을 읽거나, 1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촨커우로 가서 종성이 바라보이는 강가를 걷다가 돌아오곤 했다. 행색이 초라한 흰 개가 뒤를 따라오는 날도 있었다. 저녁노을이 비치는 종성의 뒷산은 유독 붉었다. 돌아와서 시린 냉면을 먹었고 아침엔 따스한 온면과 만두를 먹었다. 음식도 기후와 풍경을 닮는지 내 입엔 거칠었다. 그래도 그동안 대륙의 안쪽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깡그리 잊을 만큼 끼니마다 혀에게 굴복했다. 오랜 습관은 질겼다. 박제가의 글에서 음식에 관한 부분만 따로 모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음식에 남달라 보였지만 또 먼 북방의 고독을 위로하는 데 그만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유배에서 풀려나면 모략과 비방이 넘치는 서울에 살 마음은 없었나 보다. 그는 부여에 살고 싶다고 적었다. 그가 잠시 현감으로 있었던 곳, 이상국(李相國)의 정자 있는 그곳에 작은 집을 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이상국은 누구며 또 스스로의 생을 누이고 싶다는 그곳은 어떤 곳일까. 나는 책을 덮었다.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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