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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6 19:39 수정 : 2017.11.16 20:30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6) 부여

박제가의 시 ‘기린각을 노래하다’는 어떤 인물의 초상화에 대한 글이다. 초상화에 대한 묘사는 직접 보았거나 누구에게 전해들은 듯 구체적이다. 귀신조차 놀랄 만한 용감하고 수려한 얼굴. 누굴까. 남중국 샤먼의 정성공기념관에서 보았던, 살아 있는 정성공을 보고 그렸다는 초상화와 그 그림을 토대로 그린 또 다른 정성공의 <행락도>. 나는 화가의 이름조차 남지 않은 그림 <행락도>에서 <의모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빙의 흔적을 느꼈다. 1790년 베이징과 나빙…. 그에게서 들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시가 정성공의 초상화에 대한 것이라면 <의모도>를 사이에 둔 박제가와 나빙의 관계는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었다. <의모도>가 그려지던 자리에 두 사람은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달팽이 뿔을 닮았다고 박제가는 시에 썼다.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은 그날의 기록을 탑의 아래에 길게 새겼다. 전쟁에서 이긴 자의 말은 거만하고 장황했다. 비아냥대며 훈계했다. 돌에 새겨진 글씨는 육신에 기록한 형벌과 다르지 않았다. 패망보다 상처의 영원이 더 쓰렸다. 불타버린 도읍에 석탑만 남았는지 목판으로 새긴 지도에도 탑의 형상은 뚜렷했다. 사진 신상웅 제공

지난 회 요약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박제가(1750~1805)가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은 명나라 말기에 남중국의 바다에서 세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했던 인물 정성공(1624~62)과 그의 일본인 어머니 다가와였다. 박제가의 그림이라 보기에는 전문화가의 솜씨가 있어 청나라의 화가 나빙(1733~99)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견이 있다. 1790년 베이징에 머물던 박제가는 나빙과 깊은 우정을 나눈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의 소식에 민감했고 변화하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며 매화그림과 초상화를 선물했다. 박제가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빙을 그리는 시를 쓴다. 1801년 다시 찾은 베이징에서 박제가는 나빙의 부음을 듣고 곡을 한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곧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된다. 박제가는 아들에게 부여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편지를 썼다.

박제가가 부여 현감으로 재직했던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1792년 8월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5월 파직되었다. 그사이 아내와 사별했고 평생을 의지하고 따랐던 이덕무도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 친구를 한꺼번에 잃은 박제가는 타향에서 기쁨 없는 봄을 맞았다. 그가 한때 머물렀을 동헌 앞 잔디밭을 지나 백마강으로 갔다. 반짝이는 강물과 흔들리는 갈대를 보았다. 다시 박제가의 유배지 종성 강가의 스산함과 붉은 노을이 떠올랐다. 10년 뒤 그는 그곳 종성에서 미친 눈보라를 겪으며 여기 부여의 따스함과 풍요로움을 그렸을지도 몰랐다. 가을의 부소산은 어디고 좋았다. 늙고 푸르른 소나무 숲과 주황색 등불이 가득한 터널 같은 오솔길을 자주 걸었다. 천수백년 전 어느 때 이 풍성한 백제 왕실의 정원도 조선의 ‘남한산성’과 같은 운명이었을까. 삼천 궁녀들이 저 아래 강물로 몸을 던졌다는 기록을 나는 신뢰하지 않았다.

박제가가 여생을 살고 싶었다는 이상국(李相國)의 정자가 있던 곳은 어디일까. ‘상국’은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정승의 벼슬을 한 자를 말했다. 그는 누굴까. 부여 정림사 석탑은 넓고 허허로운 마당에서 늘 혼자 저녁을 맞았다. 밤에 달이 뜨면 도로 탑이 보고 싶었다. 탑이 달팽이 뿔을 닮았다고 박제가는 시에 썼다.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은 그날의 기록을 탑의 아래에 길게 새겼다. 전쟁에서 이긴 자의 말은 거만하고 장황했다. 비아냥대며 훈계했다. 돌에 새겨진 글씨는 육신에 기록한 형벌과 다르지 않았다. 패망보다 상처의 영원이 더 쓰렸다. 불타버린 도읍에 석탑만 남았는지 목판으로 새긴 지도에도 탑의 형상은 뚜렷했다. 지도에 그려진 옛 부여의 내부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다가 유독 하나의 지명에서 멈췄다. 백마강 건너의 누각.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에서 저녁을 볼 때마다 늘 눈에 들어오던 작은 산 아래 ‘대재각’(大哉閣)이었다.

강 건너 백강마을에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살았다. 백강이 그의 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역사의 기록에서 그는 청과의 화친을 반대한 인물로 분류되었다.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의 화해를 주선했다고도 전한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 안에 커다란 글씨가 조각된 바위가 있었다. 대재각이었다. 효종이 이경여에게 내린 글을 송시열이 썼다고 했다.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남았는데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 아픔은 병자호란의 통한을 가리킨다고 안내문은 적었다. 글씨는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 옆에 또렷이 남겨진 백강 이상국. 박제가가 말한 이상국은 바로 이경여였고 유배지 종성에서 풀려나면 작은 집을 짓고 고기 잡고 나무하며 살고 싶다고 했던 곳이 이곳 백강마을이었던 것이다. 나는 송시열과 효종과 북벌이라는 오랜 선입견 앞에서 박제가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대재각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 백강마을에 있는 정자로 부산 각서석(浮山刻書石,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을 보존하기 위해 세웠다. 부산 각서석은 백강 이경여가 북벌에 관해 효종에게 올린 상소에 대해 효종이 답한 글귀 중에서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至痛在心), ‘일모도원’(日暮途遠) 여덟자를 써서 이경여의 아들 민서에게 전한 것을 1700년(숙종26)에 손자 이명이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를 보존하기 위해 정자를 짓고 <상서>의 ‘대재왕언’(大哉王言, 크도다 왕의 말씀이여)에서 따와 대재각(大哉閣)이라 이름을 붙였다. 각서석 오른쪽에 백강 이경여의 이름이 보인다. 사진 신상웅 제공

#‘기린각’의 주인공은 정성공이었을까

그림 <의모도>만큼이나 복잡한 물음을 안겨주는 박제가의 시 한 편이 있다. ‘기린각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의 시. ‘기린각’(麒麟閣)이란 중국 한나라 때 신하들의 초상화를 그려 봉안한 누각을 말한다. 당시에는 북쪽 흉노족의 침략과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기린각에는 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과 황제를 보필한 고위 관료 11명의 초상화가 모셔졌다. 한마디로 중국 한족의 적통인 한나라의 성립에 가장 공이 컸던 자들을 기리는 공간인 셈이었다. 그런데 박제가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무려 2000여년 전, 그것도 당시의 조선과는 별 관계도 없는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 그가 시를 지어 칭송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기린각’을 꼭 한나라 때의 사건이 아닌 북쪽의 오랑캐에 맞서 황실을 위해 싸운 어떤 인물을 기리는 상징으로 읽으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었다.

박제가의 시에서 가리키는 인물은 이랬다. 크나큰 공을 세웠으며 그의 이름만 들어도 북쪽의 오랑캐가 두려워하던 인물. 황제로부터 병권을 건네받고 전쟁터에 나갔던 장군이며 제후의 작위를 받았던 사람. 더 나아가 월나라의 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범려와 조나라의 재상 조승 그리고 기린각에 봉해진 11명의 공신 중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 곽광에게 견줄 만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는 누굴까. 박제가는 누구를 떠올리며 이 시를 지었던 것일까. 기린각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해도 꼭 한나라에 의미를 한정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또 북쪽의 오랑캐라는 글자 역시 흉노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주족을 가리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혹시 청나라에 대항해 명나라의 마지막을 버티던 정성공을 기리기 위해 이 시를 쓴 것은 아니었을까. 시의 내용과 의미하는 바는 기록으로 남은 정성공의 행적과 많은 부분에서 일치했다.

그림 <의모도>에서 박제가의 실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림 위에 남은 그의 글씨뿐이다. 물론 그의 다른 그림들과 <의모도>를 세세히 비교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그림만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며 나는 여전히 <의모도>의 주요 부분에서 나빙의 흔적을 본다. 또한 그림 전체를 나빙이 그렸다고 보기 어려운 구석도 여러 군데다. 그림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선명한 증거는 아직 멀어 보인다. 박제가의 시 ‘기린각을 노래하다’는 어떤 인물의 초상화에 대한 글이다. 초상화에 대한 묘사는 직접 보았거나 누구에게 전해 들은 듯 구체적이다. 귀신조차 놀랄 만한 용감하고 수려한 얼굴. 누굴까. 남중국 샤먼의 정성공기념관에서 보았던, 살아 있는 정성공을 보고 그렸다는 초상화와 그 그림을 토대로 그린 또 다른 정성공의 <행락도>. 나는 화가의 이름조차 남지 않은 그림 <행락도>에서 <의모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빙의 흔적을 느꼈다. 1790년 베이징과 나빙…. 그에게서 들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이 시가 정성공의 초상화에 대한 것이라면 <의모도>를 사이에 둔 박제가와 나빙의 관계는 좀 더 명확해질 수 있었다. <의모도>가 그려지던 자리에 두 사람은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백마강으로 갔다. 반짝이는 강물과 흔들리는 갈대를 보았다. 다시 박제가의 유배지 종성 강가의 스산함과 붉은 노을이 떠올랐다. 10년 뒤 그는 그곳 종성에서 미친 눈보라를 겪으며 여기 부여의 따스함과 풍요로움을 그렸을지도 몰랐다. 사진 신상웅 제공

#연재를 마치며

백강마을은 부산을 등지고 있었다. 높지 않았지만 강과 너른 들을 두고 있어 시야는 멀었다. 어느 날엔 이곳에 올라 들판 너머 아득히 사라지는 낙조를 지켜보던 박제가가 있었다. 그의 평생의 화두로 보였던 북학과 이곳 백강마을에서 감지되는 북벌이 그의 의식과 행동 안에서 어떻게 만나고 부딪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북학과 북벌의 어지러운 선택지 사이에서 박제가의 번뇌가 읽히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단념했을 것이다. 산에서 내려다보는 백강마을은 작은 둥지처럼 아늑했다. 이경여가 아니었어도 누구든 살 만한 곳으로 보였다. 박제가는 이곳으로 오지 못했다. 종성의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곧 숨을 거두었다.

부여를 휘감고 흐르는 강은 해가 지는 쪽으로 향했다. <의모도>를 따라 나선 길은 늘 바다를 가운데 두고 맴돌았다. 바다에서 태어난 정성공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빙과 박제가 탓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히라도의 바다가 있었고 광저우와 통진의 바다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다의 길이 있어서였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 나빙의 고향 양저우에서 민물 복어를 먹을 때 박제가가 부여에서 쓴 시의 구절이 생각났고 초봄의 부여에서 우여회를 앞에 두면 다시 양저우의 도어(刀魚)가 떠올랐다. 이름은 달랐지만 둘은 같은 종류였다. 강을 거슬러 온 바다와의 거리와 들어앉은 자리에서 부여와 양저우는 엇비슷했다. 우연이었을 것이다. <의모도>의 실체에 얼마만큼 다가섰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하나의 문이 열리면 예상 밖의 벽이 나타났고 아직 하지 못한 말도 남았다. 언제고 다시 날개 달린 물고기 ‘아고’를 먹으러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도모노우라의 바닷가나 베이징의 골목에 서 있을 것이다. <의모도>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끝>

신상웅 염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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