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21 17:52
수정 : 2017.08.2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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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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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박종현의 공감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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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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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벌어진 논쟁의 이면에는 상반된 두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도의 급여를 받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주장과 받는 임금만큼의 값어치를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 논쟁의 배후에는 각자의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상호작용을 어떠한 원리에 의해 기초해 운영할지에 관한 근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자리잡고 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그에 합당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가 ‘사회적 규범’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그 대가를 얼마나 가져갈지는 각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입각한 시장거래에 맡기는 것이 옳다며 이에 간섭하는 것은 사회적 자원의 낭비를 가져올 뿐이라고 반박한다.
수요·공급의 경제 논리는 사회와 무관할 수 있나
그런데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사회적 영향과 무관하게 순수하게 개인적인 이익의 고려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던 적은 없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자신의 평판을 신경쓰며 가격을 불렀고, 사회적 규범을 염두에 두며 거래에 임했다. ‘공정가격’에 비해 과다청구를 하거나 과소지불을 하는 것은 세상을 떠받치는 도덕적 질서의 위반이자 일종의 절도로까지 여겨졌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최근 들어 그 진가가 드러나고 있는 칼 폴라니에 따르면, “시장은 본성상 사회 속에 묻어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원리를 뒤집어 시장과 경제를 사회로부터 독립시키고 시장원리에 의해 사회를 조직하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말 ‘경제적 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사회의 간섭 없이 경제생활 전체를 스스로 조직하려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고, 사람들은 사회의 보호막이 사라진 시장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개별적으로 입증함으로써 생계를 꾸리고 존엄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 결과 유례 없는 물질적 번영이 가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열에서 낙오된 사람들이 속출했고, 광범위한 불안과 불만과 반발이 파시즘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케인즈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하려면 경제에 대한 개입을 통해 완전고용을 이루고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경제적 역할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에 대해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사회의 개입은 독재와 비효율과 빈곤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맞섰지만, 현실은 케인즈의 편이었다. 2차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시장과 경제를 다시 사회의 통솔 아래 두려는 의식적 노력으로 30년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던 반면,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그 흐름이 뒤집혀진 오늘날에는 고단하고 불안한 삶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삶의 최종 심판관은 누구?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은 옳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삶의 최종 심판관은 시장이 아니라 사회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시장을 민주주의의 지배 아래 둘 수 있어야 한다. 각자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 동료 시민들과의 연대에 의해 그 통제력을 강화하며 삶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우리의 삶을 품위 있고 자족적으로 만들려면 우리의 경제적 활동과 부를 어떻게 조직하고 사용할 것인가를 모두가 같이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좋은 사회적 규범을 만들고 이 규범이 시장과 경제활동 속에 구체적으로 반영되도록 제도화하는 것은 정책의 몫일 터이다. 케인즈는 공적 의식이 투철하고 지혜로운 관료가 정책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 반면, 폴라니는 각자가 자신의 경제적 터전에서부터 각양각색의 아이디어들을 실험하고 그속에서 검증된 시도들이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구체적 정책결정에도 반영되도록 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경제는 자유시장에, 정치는 직업 정치인들에게, 정책은 전문 관료에게 맡기던 ‘20세기의 분업’이 아니라 시장 속에 사회적 규범이 스며들고 정치와 정책의 영역에도 민간과 시민사회에 뿌리를 둔 새로운 유형의 정책가들이 왕래하는 ‘21세기의 분업’을 꿈꿔본다. 그럴 때 비로소 시장이냐 정부냐의 소모적 논쟁에서도 자유롭게 될 것이다.
경남과학기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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