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24 11:30
수정 : 2017.10.2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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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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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conomy | 박종현의 공감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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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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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사피엔스의 미래를 놓고 우리 시대의 지성들이 설전을 벌였다. 알랭 드 보통과 말콤 글래드웰의 현란한 말솜씨도 인상적이었지만, 저명한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가 보인 경제학에 대한 엄청난 신뢰는 충격적이었다. 그는 인류가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그 근거를 경제학자들의 연구에서 찾았다. 사회 전반에 걸친 복잡한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며, 경제학자들은 복잡한 사회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모두 제시할 수 있다는 게다. 기후변화처럼 복잡한 문제를 수요와 공급으로 세상을 보는 경제학자들에 맡기지 말아야 한다는 반박이 있었지만, 토론 주제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사회자의 개입으로 논의는 중단되었다. 경제학자들이 진정한 경제 문제인 금융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다는 점은 짚어지지 않았다.
사실 경제학의 역할에 대한 ‘환상’은 오늘날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경제학은 사회과학 중 가장 견고한 학문으로 공인되었고, 정책 결정 과정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문도 경제학이다. 1930년대 초반 라이오넬 로빈스는 경제학이란 인간 행동의 과학이어야 한다며, 주어진 목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달성해줄 수단들을 찾아내는 합리적 선택의 학문으로서 경제학을 새롭게 정의했다. ‘경제학=최적화+균형’이라는 방정식이 확립되었고, 경제학은 수리적 모형에 기초해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과학이 되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95년, 시카고 법대에서 어느 경제학자의 발표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경제적 선택을 할 때 이미 지불한 비용, 곧 매몰비용은 무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려해 행동하고, 자발적 협상에 의해 쌍방이 더 나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는데도 합의하지 않는 사례들을 거론했다. 사람들이 경제학의 믿음만큼 의지가 굳지도, 이기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증거들에 제시되자, 법적 판단에 표준적인 경제학의 사고방식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리처드 포스너 연방판사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도 합리적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고 반론을 펼쳤다. 발표자는 합리성을 가정하는 한 그 모형은 계속해서 엉뚱한 예측을 내놓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대목에서 연방판사는 폭발하고 말았다. “귀하는 정말로 비과학적이군요!” 당신은 경제학자가 아니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20년 전의 그 경제학자가 바로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쎄일러다. 경제학이 인간 행동의 진정한 과학이기 위해서는 살아 숨쉬는 현실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는지를 관찰과 설문과 실험을 통해 철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쎄일러는 4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현장의 증거에 기반해 행동경제학의 이름으로 수행된 연구들을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현대 경제학의 핵심 기둥을 흔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저명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는 데 어려움도 겪었고 많은 경제학자들의 분노도 견뎌야 했다. 그는 동시에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은 나름의 일관성을 띠고 있기에 모형화와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경제학의 ‘과학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그렇기에 배교자의 길을 걸었음에도 학계의 내부자가 될 수 있었다.
쎄일러가 보여준 진짜 인간에 관한 정교한 관찰과 편견 없는 분석 그리고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대한 치열하면서도 유쾌한 도전은 경제학의 정체성과 경제학자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로빈스가 경제과학의 정의를 제시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 존 메이너드 케인즈는 도덕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촉구하는 편지를 제자에게 보냈다. 경제학은 단순화와 추상화에 기초한 모델에 힘입어 복잡한 현실의 핵심을 포착하고 예측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이지만, 가치판단의 문제를 명시적으로 다루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성찰에 의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도덕’과학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경제학은 케인즈의 ‘도덕과학’이 아니라 로빈스가 제시한 ‘경제과학’의 길을 걸었다. 경제학을 자연과학에 가깝게 만들려는 시도들과 함께 사람들의 동기와 기대 그리고 야성적 충동과 심리적 불확실성은 모형에서 제거되었다. 경제학은 형식적 엄밀성에 기초한 견고한 학문이 되었지만 현실 설명력은 약화되었고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삶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졌다.
경제학을 도덕과학으로 이해하게 되면, 경제는 객관적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가는 현실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에는 이득에 대한 계산과 도덕에 대한 고려가 함께 자리한다는 점도 강조된다. 사람들이 경제활동의 목적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 경제학자들이 이들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어떠한 도덕적 비전과 사회상을 제시하는가에 따라 현실의 경제도 그에 걸맞는 모습을 띠게 될 것이다.
쎄일러의 작업은 케인즈의 직관적 통찰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시도이자, 경제학을 도덕과학으로 다시 세우려는 시도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 속에서 이득에 대한 계산과 도덕에 대한 고려가 다양한 동기와 편향들로 표출된다는 점을 예리하게 밝혔고, 사람들의 비합리적 행동 속에서 모종의 일관성을 포착해 경제이론의 예측능력도 높였기 때문이다. ‘넛지’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그의 작업이 사회의 공동선에 대한 명시적인 가치판단에 기초해 도덕과학을 지향한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도덕적 지향과 방법론이 상이한 다른 정체성의 경제학도 존재한다. 공동체의 목적을 무엇으로 세워야 할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질적 부를 어떻게 생산하고 어떻게 나눌지의 과제를 놓고 펼쳐지는 여러 도덕과학들의 백화제방을 기대해본다.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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