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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 ‘광화문통’이 아니라 ‘세종로’라고 처음으로 노래한 대중가요는 1948년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이다. 조명암이 노랫말을 쓰고, 김해송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당시의 미군정이 실시되는 답답한 현실을 담았다. 조명암이 월북한 뒤 노래 가사는 건전가요식으로 바뀌었다. ‘꿈꾸는 백마강’ 등 많은 노랫말을 쓴 조명암은 일제 때부터 사회의식이 담긴 작품을 많이 썼다. 조명암의 딸 조혜령씨가 부친이 작사한 음반을 들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46년께 찍은 것으로, 조명암과 아내 장연옥씨, 아기가 조혜령씨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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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이영미의 광화문시대
(2) ‘울어라 은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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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 ‘광화문통’이 아니라 ‘세종로’라고 처음으로 노래한 대중가요는 1948년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이다. 조명암이 노랫말을 쓰고, 김해송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당시의 미군정이 실시되는 답답한 현실을 담았다. 조명암이 월북한 뒤 노래 가사는 건전가요식으로 바뀌었다. ‘꿈꾸는 백마강’ 등 많은 노랫말을 쓴 조명암은 일제 때부터 사회의식이 담긴 작품을 많이 썼다. 조명암의 딸 조혜령씨가 부친이 작사한 음반을 들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46년께 찍은 것으로, 조명암과 아내 장연옥씨, 아기가 조혜령씨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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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모던보이>(정지우 감독, 2008) 초반부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등장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배우 박해일이 자기 차를 직접 운전하여 총독부 앞 큰길가에 세워놓고 총독부로 출근하며, 그 앞으로 인력거와 행인들이 한가로이 거니는 풍경 말이다. 이 조선총독부 장면이 유독 신선하게 보인 것은, 가까이하기 힘든 권위적인 관청이 아닌 조선인이 출퇴근하는 일상의 공간으로 그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건물은 엔간해서는 이런 방식으로 비춰지지 않았다. 아니 ‘방식’을 따지기 전에, 꽤나 멋진 외양임에도 대중가요나 극영화에 등장하는 빈도가 아주 낮은 건물이다. 대중예술에서 흔히 다루는 사랑이니 가족이니 하는 이야기들과 어울리지 않는 곳, 보통사람이라면 거대한 힘에 지레 짓눌려 편치 않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건물로 신축된 이래 해방 후 미군정청, 대한민국의 중앙청으로, 정치권력의 핵심이 자리했던 곳, 그게 어떻게 보통사람들에게 편안한 건물일 수 있겠는가. 중앙청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그 용도가 바뀐 것이 1986년이다. 8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개관하자마자 수많은 관람객이 밀어닥친 것은 그 안에 전시된 유물에 대한 궁금증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진 그 공간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대통령의 별장인 청남대가 공개되자마자 관광객이 몰려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제강점기의 영화에도 조선총독부와 그 앞길인 ‘광화문통’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그저 <총후(銃後)의 조선>(1938)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나 잠깐 그 모습이 비칠 뿐이다.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이 영화는 1937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중일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다짐하는 전쟁홍보 영화이다.(‘총후’란 ‘총의 뒤’ 즉 전쟁터가 아닌 후방을 의미한다.) 전쟁에 지원하는 조선인 병사들을 태운 군용열차가 깃발 흔드는 군중들의 전송을 받으며 떠나고, 부녀자들이 금비녀를 뽑아 전쟁 비용으로 헌납하고, 여자들이 훈련병을 위한 도시락과 빨래, 이발, 위문대(慰問袋, 후방의 국민들이 군인에게 보내는 위문품으로 소소한 물품들을 넣은 헝겊주머니) 봉사를 하는 장면 등이 포착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조선총독부 건물이 나오는 장면은 각 도의 도지사를 불러 시국에 관한 훈시를 내리고 조선인 지원병을 격려하는 미나미 총독과 함께이다. 총독부 건물은 이 정도가 돼야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1948년 장세정의 ‘울어라 은방울’
일제 ‘광화문통’ 아닌 ‘세종로’ 노래
광복의 감격과 새시대 희망속
미군정 현실 등 사회의식 담겨
작사자 조명암 48년 월북 이어
작곡자 김해송 6·25 실종되자
“젊은 가슴” “건설에 청춘복지” 등
건전가요식으로 가사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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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송은 1930~40년대 재즈곡 등을 많이 만든 천재 작곡가였다. 그는 1946년 백은선(무용가), 김정환(무대미술가) 등과 함께 케이피케이(KPK)악단(혹은 쇼단)을 설립해 미군 구락부와 극장 쇼를 주름잡았다. 케이피케이쇼단 시절의 장세정, 윤부길, 신카나리아, 김해송, 이난영, 이봉룡(왼쪽부터).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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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의 ‘그날이 오면’보다 앞서 발표
그러니 일반 극영화에서는 총독부 건물과 광화문통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친일적 내용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조선인 농촌 청년이 ‘큰 꿈’이 있다며 지원병에 나가는 이야기를 다룬 <지원병>(안석영 감독, 1941)도 주인공 춘호가 고민에 빠져 걸어 다니는 장면에서 기껏 경성부청(이후 서울시청) 앞 정도가 나올 뿐이다. 조선인 청년의 입대 지원 이야기를 다룬 ‘웰메이드’ 영화 <조선해협>(박기채 감독, 1943)에서 지원병들의 시가지 행진 장면을 그리면서도 광화문통이 아니라 태평로 거리로 살짝 비껴 있다. 그만큼 총독부 건물은 감히 함부로 포착하기 힘든 피사체였다.
그런 점에서 해방 후에 등장한 대중가요 ‘울어라 은방울’이 당당하게 세종로 거리를 그려낸 것은 결코 허투루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1. 해방된 역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누구를 싣고 가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바라보니 별들이 떴네
2. 자유의 종이 울어 8·15는 왔건만/ 독립의 종소리는 언제 우느냐/ 멈춰라 역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포장을 들고 보니 종은 잠자네
3. 연보라 코스모스 앙가슴에 안고서/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 색시냐/ 달려라 푸른 말아 덕수궁이 여기다/ 채찍을 휘두르니 하늘이 도네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1948,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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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작곡가 김해송은 ‘오빠는 풍각쟁이’ ‘울어라 은방울’ 등 많은 곡을 남겼다. 김해송은 가수 이난영의 남편이자, 김시스터즈의 아버지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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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본식 이름 ‘광화문통’ 대신, 새 이름 ‘세종로’를 거명한 것도 그렇거니와 광화문 로터리에 서서 삼각산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노래에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았지만, 이 앵글로 포착된 장면을 상상하면 넓은 세종로 전체와 미군정청으로 바뀐 옛 총독부 건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삼각산까지 꽉 찬 미장센이 떠오른다.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라고 노래한 심훈의 ‘그날이 오면’만큼 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중가요에서 이런 노래가 등장하다니 정말 해방이 된 게 맞긴 맞다 싶다.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 수록된 시집을 1932년에 출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이 시집은 1949년에야 비로소 빛을 보았다. 그가 죽고 무려 13년이나 지난 때였다. ‘울어라 은방울’은 그보다 한 해 이른 1948년이다.
그래서일까. 이 노래의 2절은 꽤 심상찮다. 1절의 감격과는 대조적으로 답답하고 암울한 정치적 상황이 ‘잠자는 보신각 종’으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이 노래가 발표된 때는 노래 가사처럼 해방이 됐지만 독립을 하지 못한 채 3년째 미군정의 상태에 있고, 게다가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분단이 제도화되기 직전이었다.
사회의식 강했던 작사자 조명암
아무리 상황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대중가요에서 감히 이런 정도의 형상화를 해낸다는 것은 꽤나 놀랍다. 작사·작곡자를 궁금해하며 찾아볼 만한 수준인 것이다. 조명암과 김해송,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스타 창작자였음에도 옛 대중가요에 깊은 관심이 없다면 다소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둘 다 분단과 함께 남한에서 사라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김해송은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의 남편, 즉 김시스터즈의 아버지이다. 뛰어난 가수이기도 한 그는 작곡자로도 매우 출중했다. 이난영의 ‘울어라 문풍지’ 같은 트로트 곡도 잘 지었고 무엇보다도 재즈나 블루스 계열의 음악을 다루는 능력이 당대 최고였다. 해방 후 케이피케이(KPK)악극단을 이끌며 활발히 활동하다 전쟁과 함께 실종되었고, 한동안 월북자로 간주돼 남한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이에 비해 조명암은 확실한 월북자이다. 와세대대학에서 유학하며 대중가요 가사와 대중적인 희곡을 썼던 그는 일제강점기 박영호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 작사가였다. ‘알뜰한 당신’, ‘선창’, ‘꿈꾸는 백마강’, ‘고향초’ 등 히트곡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며, 말맛을 잘 살리는 섬세한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48년 월북했고 북에서도 희곡작가로 승승장구하여 문화성 부상,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김일성상 계관인으로 80살까지 장수했다. 대중가요의 특성상 사회적 관심이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그의 데뷔작을 보면 그가 사회적 관심을 꽤 지닌 청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사 신춘문예에 유행가 부문에서 가작을 받은 ‘서울노래’가 그것이다.
1. 한양성 옛 터전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 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2.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년 꿈이 자네/ 앞 남산 봉화불도 꺼진 지 오랩니다
3. (발표 때 1행 생략)/ 종소리 스러진 밤 나그네가 웁니다
4. 밤거리 서울거리 네온이 아름답네/ 가로수 푸른 잎에 노래도 아리랑
5. 사롱 레스토랑 술잔에 띄운 꽃잎/ 옛날도 꿈이어라 추억도 쓰립니다
6. 꽃 피는 삼천리 잎 트는 삼천리/ 아세아의 바람아 서울의 꿈을 깨라
조명암 ‘서울노래’, <동아일보> 1934.1.3.
꽃잎 지는 무궁화, 스러진 종소리, 꺼진 봉홧불은 말할 것도 없이 망해버린 조선의 형상이다. 특히 종소리, 잠, 꿈 등은 ‘울어라 은방울’에서도 중요하게 쓰인 시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취입될 때는 4절로 압축됐는데 그나마 금지처분을 받았고, 망한 조선을 형상화한 대목들이 두루뭉술하게 ‘순화’되어 다시 발표되었다. 이 노래가 ‘대중가요답지 않은’ 정치적 관심을 드러내고 있어 불온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을 잠들어 꿈꾸는 상황으로 보고 ‘아세아의 바람’이 이를 깨워야 한다고 노래한 이 내용은 저항·항일·독립 의지의 표현이라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좀 힘들다. 20세기 초부터 저항적 지식인들에게 존재했던 아시아 연대의 논리가 만주사변 무렵의 ‘오족협화’론, 중일전쟁기의 ‘동아신질서’론, 태평양전쟁기의 ‘대동아공영권’론 등 일제의 침략 이데올로기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노래의 발표 연대가 1934년이니 친일적 노래라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반일·해방을 지향한다고는 결코 볼 수 없고, 몇 년 후에 친일적 논리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는 관점이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일제 말 적극적 친일행위를 경유한 조명암이 해방 후 ‘울어라 은방울’로 다시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드러내었지만, 이 원래 가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월북 작가 작품으로 금지될 처지에 놓이자 반야월(박남포)이 개사하고 김해송의 처남인 이봉룡이 편곡하는 방식으로 조명암·김해송의 이름을 지웠다.
1.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사랑을 싣고 가는 서울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2. 연보라 코스모스 가슴에다 안고서 누구를 찾아가는 서울 색시냐/ 달려라 은마차야 보신각이 여기다/ 가로수 흔들흔들 네온 빛 곱다
3. 성당의 음악종이 은은히도 들리면/ 자유가 나래치는 서울 지붕 밑/ 뭉쳐라 젊은 가슴 새 희망을 위하여/ 건설에 청춘복지 어서 달리자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박남포 개사, 이봉룡 작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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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라 은방울’의 작사자 조명암은 대중가요 속에 당시의 사회의식을 많이 담았다. 1948년 월북한 그는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 등을 역임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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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에 덕수궁이 언급된 이유
첫 시작부터 김이 빠진다. 감격적이고 선명한 의미를 지닌 ‘해방된 역마차’에서 말 재미에 치우친 ‘은마차 금마차’로 바뀌었다. 창작자의 ‘자유의 종’, ‘독립의 종소리’, ‘종은 잠자네’로 이어지며 작가의 정치적 관심을 집약해놓은 2절은 통째로 사라졌다. 대신 서양적 이미지인 ‘성당’, 건전가요 발상의 ‘건설’, ‘뭉쳐라 젊은 가슴’ 등으로 대한민국 정권에 위해를 끼치지 않는 노래임을 노골적으로 과시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노래 속 세종로에 정작 광화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올해 방영된 티브이 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에서 1930년대에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유령이 2010년대 서울에 나타나 ‘총독부 건물이 사라진 광화문을 보고 싶다’며 관광을 나서는 장면이 나오지만 사실 일제강점기 육조거리에는 이미 광화문이 없어졌었다. 일제가 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울어라 은방울’, ‘그날이 오면’에서 육조거리, 세종로, 삼각산이 거론되면서도 광화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런 정황을 보자면 ‘울어라 은방울’ 3절의 ‘덕수궁’도 범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싶다. 많은 궁궐 중 하필 왜 덕수궁이었겠는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해 있던 고종은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못하고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으로 옮겨왔다. 러시아, 영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왕이 머무는 동안 나라는 망했고, 마지막 두 임금이 이곳에서 세상을 떴다. 고종과 순종의 인산을 경험한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덕수궁은 비운의 궁궐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1절에서 해방과 더불어 세종로와 삼각산을 먼저 노래한 것은 그만큼 각별한 의미로 읽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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