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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10 09:56 수정 : 2017.12.10 16:02

광화문 뒤 청와대 주인을 그린 영상작품은 독재정권 시절 금기였다. 대통령이나 대선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사진은 <에스비에스>의 2012년 드라마 <추적자>에서 재벌 사위인 거물 정치인 강동윤(김상중 분)을 형사 백홍석(손현주 분)이 권총으로 겨누는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토요판]이영미의 광화문 시대
⑪ 광화문 ‘뒤’ 파란집

광화문 뒤 청와대 주인을 그린 영상작품은 독재정권 시절 금기였다. 대통령이나 대선주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와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사진은 <에스비에스>의 2012년 드라마 <추적자>에서 재벌 사위인 거물 정치인 강동윤(김상중 분)을 형사 백홍석(손현주 분)이 권총으로 겨누는 장면. 에스비에스 제공

세종로와 광화문 ‘너머’는 최고 권력자의 공간이다. 대중예술에서 이들을 그려내는 것은 그야말로 살얼음판 걷는 일보다도 힘들었다. 특히 실사(實寫) 화면을 보여주는 영화나 티브이(TV) 드라마에서는 더욱 그랬다. 대중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진짜 대통령들의 이미지와 배우의 외모·연기를 계속 비교하며 작품을 보게 되는 것도 부담이려니와 그저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을 소재로 삼아 허구적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로 느껴졌을 것이다. 온갖 편법적 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을 하던 대통령의 시대에 누가 감히 대통령을 소재로 ‘꾸며진’ 이야기를 만들겠는가.

대통령을 연기하는 얼굴이 제대로 화면에 비친 건 이 장기집권 대통령의 시대가 끝난 뒤였다. 1981년 <문화방송>(MBC)이 야심차게 만든 텔레비전 드라마 <제1공화국>(김기팔 극본, 고석만 연출)이 그것이다. 최불암이 이승만 역을 맡았다. 이전에는 고작 목소리 연기뿐이었다. 1967년 <동양방송>의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이영신·김교식 극본)을 필두로 하여 <동아방송>의 <정계야화>(김기팔 극본)로 이어지는 다큐드라마들이 그 시작이었다. 이승만 역을 맡은 성우 구민의 기막힌 목소리 연기는 이후 이승만 연기의 전범이 되었다.

앞의 두 편이 다큐드라마의 형식이었는데, 좀더 허구성이 강화된 라디오 드라마 <잘 돼갑니다>(DBS, 한운사 극본, 안평선 연출)에서도 이승만은 구민이 연기했다. 이 작품은 대통령의 이발사를 주인공 삼아 이승만 정권 말기 4년 동안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이발사는 ‘각하’의 질문에는 무조건 ‘잘 돼갑니다’라고만 답하라고 단단히 교육을 받은 뒤에야 떨리는 손으로 대통령 머리를 손질할 수 있었다.

극중 이승만 얼굴 제대로 안 비쳐

이 작품은 이듬해인 1968년 조긍하 감독이 영화화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얼굴이 드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을 배우로는 공개오디션을 거쳐 흡사한 외모의 70대 노인 최용한을 뽑았으나, 정작 영화에서는 그 얼굴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다. 카메라는 대통령의 얼굴이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등 뒤와 먼 거리에서만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최용한의 연기력 탓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히 대통령의 인간적인 얼굴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공식적으로 허용된 뉴스 화면 속 대통령의 얼굴이 아닌 희로애락과 복잡한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얼굴은 감히 보여줄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진 다른 인물들은 과감히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기붕은 장민호, 박마리아는 김지미, 조병옥은 박노식이 연기하며 희로애락의 감정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런데 오로지 대통령 얼굴만 카메라가 감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북한 영화에서 김일성 역을 하는 배우의 얼굴을 제대로 노출하지 않는 것과 흡사하다. ‘최고 존엄’의 얼굴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것, 그의 내면과 감정의 변화를 엿보고 공감하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셈이다. 대한민국에서도 1970년대까지는 이랬다.

더군다나 영화 <잘 돼갑니다>는 개봉되지도 못했다. 제작사는 공보부의 지시대로 데모 행렬 등의 장면을 축소하는 등 당시 검열에 맞추고자 노력했다. 심지어 1968년 추석 개봉 예정으로 예고편까지 만들어 상영했다. 그런데 개봉 전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극장 간판을 떼었고 개봉은 무산됐다. 3선 개헌을 계획하고 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무리한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하다 몰락한 이승만 정권의 말년 이야기가 극장에서 개봉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당시로선 거액인 4천만원의 제작비는 고스란히 날아갔고, 제작자였던 김상윤은 엄청난 빚만 남긴 채 1975년에 병사했다. 영화 개봉 허락을 받으려 청와대를 찾아갔던 아들은 경비경찰에게 구타당한 뒤 정신병원에서 발견됐다.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영화는 1987년 6월 시민항쟁이 지난 뒤인 1989년에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작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다 꺼져버린 뒤였다.

박정희 때까진 대통령 ‘극화’ 금기
1968년 제작 영화 ‘잘 돼갑니다’
개봉 전날 정보부에서 간판 떼
제작자 병사, 아들은 정신병원에

2003년 <보디가드> 시작으로
‘허구적’ 대통령 드라마 등장
대통령 딸 등 소재도 무제한
대중의 높아진 눈높이 반영

제5공화국 초기인 1981년에 티브이 드라마 <제1공화국>으로 이승만 역의 배우 얼굴이 비로소 클로즈업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박정희 피살과 광주에서의 학살을 거치면서 대중은 대통령이 떠받들어야 하는 왕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을 것이다. 대통령 부인을 국모라 부르던 풍토도 이때부터 사라졌다. 라디오에 머물고 있던 정치 다큐드라마가 티브이로 올라오도록 만든 것은 바로 대중들의 고양된 정치적 관심이었다. 정권으로서는 여전히 이런 드라마가 부담스러웠겠지만 대중의 변화를 마냥 막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텔레비전 후발주자였던 <문화방송>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폭증하는 관심을 받아들여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와 <제1공화국> 등 야심찬 기획을 성사시키면서 ‘드라마 왕국 엠비시’의 명성을 쌓아갔다.

그 이후엔 어땠을까. 6월항쟁 이후 다큐드라마에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이 단골 인물로 설정되었지만, 1990년대에는 딱 거기까지였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문민정부 시대인 1995년에도 작품 내용에 검찰의 지침이 내려왔다고 하니, 대통령 형상화란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에서 실존했던 대통령이 아닌 그냥 ‘대통령’이라는 직함의 인물을 설정하여 허구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았을 것이다.

2009년에 개봉된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을 엄숙하고 권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모습으로 코믹하게 그렸다. 임기 만료 6개월을 앞두고 로또에 당첨된 김정호 대통령(이순재 분)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발을 올리고 앉은 모습. 소란플레이먼트 제공

악인 대통령 드라마가 아직 없는 까닭

이것이 가능해진 건 노무현 대통령 시대부터였다. 외압의 문제도 해결됐을 테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이 이런 드라마를 편안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말하자면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대통령을 5년마다 바뀌는 ‘선출직 공무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가장 먼저 나온 작품이 드라마 <보디가드>(KBS2, 이한 극본, 전기상 연출)였다는 점이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준다. 대통령 후보 정원익(임채무 분)의 경호원이 되어 예상치 못하게 정경유착의 비리를 파헤치게 된 홍경탁(차승원 분)은 마지막 회에서 대통령 경호원으로 청와대에 근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새 대통령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참모들과 원탁 테이블 앞에 서서 정책 토론에 열중하는 젊고 개혁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드라마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대통령 이미지였다. 2003년이 아니었다면 이런 캐릭터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대통령이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는 계속됐다. 영화 <한반도>(강우석 감독, 2006)처럼 정치나 역사에 대한 내용이 아닌 작품도 많았다. 연애물인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SBS, 김은숙 극본, 신우철 연출, 2005)에서는 여주인공이 대통령의 딸(전도연 분)로 설정됐고, 드라마 <진짜 진짜 좋아해>(MBC, 배유미 극본, 김진만 연출, 2006)에서는 여주인공 출생의 비밀에 대통령이 얽혀 있다. 이제 ‘대통령 딸’이란 설정이 ‘재벌 아들’이란 설정과 그리 다르지 않게 보일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작품이 자꾸 나오다 보니 청와대와 경복궁 부근은 늘 드라마에 비치는 단골 장소가 되었다. 청와대 앞길은 항상 교통통제가 이루어지는 삼엄한 공간이 아니라 밤에 애인과 함께 거닐 수 있는 멋진 길로 형상화됐다.

드라마에서 애정물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추리와 액션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대통령은 더욱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가 됐다. 외국의 다국적 기업, 미국이나 일본의 권력자, 북한의 거물까지 등장하며 우리를 둘러싼 복잡한 권력관계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정계·재계·법조계·언론계의 거물 권력자들이 대한민국을 주물럭거리면서 얽히고설키는 이야기에 어찌 대통령이란 캐릭터가 빠질 수 있겠는가. 아예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장진 감독, 2009), 드라마 <프레지던트>(KBS2, 손영목·정형민·손지혜 극본, 김형일 연출, 2011) 같은 제목의 작품이 나올 만큼 이제 대통령 캐릭터 설정은 범상한 일이 되었다. 드라마 <쓰리데이즈>(SBS, 김은희 극본, 신경수 연출, 2014)처럼 대통령 암살이라는 뜨거운 소재가 등장하기도 하고, 영화 <판도라>(박정우 감독, 2016)와 <감기>(김성수 감독, 2013)처럼 국가의 명운이 달린 대재난에 힘든 결단을 해야 하는 대통령이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국무총리 정도만 등장하는 작품은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퇴임한 지 20년이 넘은 대통령조차 겨우 등장시킬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 채 30년이 못 되었는데 이 정도이니 정말 엄청난 변화이다. 대통령이 5년마다 바뀌고 심지어 여야까지 뒤바뀌는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대통령에 대한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마주하기조차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국민이 ‘아주 내키는 건 아니더라도 차선책으로 이번엔 뽑아준다’는 마음으로 투표해서 뽑힌 인물일 뿐이다. 작품 속의 대통령이 정당과 각료, 재벌, 언론 등의 눈치를 보면서 살얼음판 걷듯 힘들게 처신해야 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이렇게 대통령이 만만하게 느껴지는 시대라고는 해도, 여전히 우리 영화와 드라마에서 대통령이 악인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검사, 청와대 참모 등의 인물이 조폭과 다름없이 그려지는 경우는 꽤 있지만, 여전히 대통령 캐릭터만은 그렇게까지 망가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역대 대통령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예의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선거 소재의 작품에서는 대권을 바라보는 후보들조차 추악한 정치인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여겨지는 서울시장 선거가 흔히 이런 작품의 소재가 된다.

이승만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잘 돼갑니다>는 1968년 개봉 하루 전날 중앙정보부에 의해 상영이 금지됐다. 민주화 이후인 1989년에 뒤늦게 개봉될 때의 포스터. 한국영상자료원 누리집 갈무리

차기 대선주자 서울시장의 ‘리얼’ 극

2011년 서울시장으로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이 당선된 직후인 2012년 봄을 가장 뜨겁게 달군 드라마 <추적자>(SBS, 박경수 극본, 조남국·진혁 연출)가 그랬다. ‘개천에서 난 용’으로 재벌의 사위가 되어 그 힘으로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한 강동윤(김상중 분)이, 재벌 딸인 아내의 과실치사를 은폐하면서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어린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며 재벌 오너의 가족이며 장차 대권을 바라는 거물 정치인과 맞서게 된 형사 백홍석(손현주 분)은 결국 진실을 밝히고 여론의 힘을 얻어 강동윤을 서울시장에서 낙선시킨다. 올해 대선이 5월 ‘장미대선’이 되는 바람에 살짝 김이 빠진 불운한 영화 <특별시민>(박인제 감독, 2017)도 대권을 바라는 서울시장의 선거를 소재로 한다. 전쟁터 같은 선거판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다. 이미지 메이킹, 여론몰이, 정치공학적 후보단일화 따위이며, 이를 위한 흑색선전과 함정 파기, 휴대폰 도청 따위는 기본이다. 이런 ‘작전’은 캠프 내라고 예외가 아니어서 선대본부장이 자기편 후보의 휴대폰을 도청하여 약점을 수집한다. 대권을 욕망하며 서울시장 삼선에 도전하는 변종구(최민식 분)는 뺑소니 치사 사고를 딸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에게 등 돌린 선대본부장(곽도원 분)을 죽이고서야 겨우 시장에 당선되지만, 영화는 그 진실이 쉽사리 묻히지는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결말로 끝맺는다.

이런 내용의 영화이니 서울시내도 독특한 느낌으로 형상화된다. 성곽 길에서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서울시내는 탐욕과 야망의 대상이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 역시 변종구가 멀리 세종로를 바라보는 장면이다. 시장 사무실에서 광화문·경복궁 너머 청와대를 바라보며 “오늘따라 저 기왓장이 더 파랗게 보인다야!”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최민식의 얼굴이 어찌 그만의 것이랴. 하지만 이런 작품이 영화와 드라마로 계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대중이 정치권력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눈이 십수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높아졌음을 방증한다. 광화문 너머 청와대의 파란 지붕만을 바라보는 머리로는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의 힘으로 현직 대통령을 파면시킬 수 있음을 생각하기가 꽤나 힘들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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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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