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⑫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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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에게는 금단의 지역이었던 광화문 앞 세종대로는 지난해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마침내 주인의 것으로 돌아왔다. 광화문광장에서의 한밤중 집회도 허용됐다. 2016년 마지막날인 12월31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치켜든 채 ‘송박영신’을 축하하는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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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응원부터 시민 품에
‘짱돌’ 아닌 축제 분위기 경험 공유
촛불로 ‘민주주의 1번지’ 자리매김 광장 노래도 시대변화 따라 진화
80년 ‘훌라송’, 87년엔 ‘아침이슬’
2016년 겨울 박근혜 탄핵촛불 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울려퍼져 세종로에 사람들이 모여 목청 높이 노래를 부르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뀐다. 바다로 납치된 수로부인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구해냈다는 설화도 있지만,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는 모양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세종로 차도에 사람이 발조차 디딜 수 없도록 횡단보도를 없앤 점도 꽤나 징후적으로 보인다. 광화문네거리에 횡단보도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8년이었다. 그러니 이 거리 한복판에 사람들이 걸어서 진입하는 일은 일종의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만의 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곳이 사람들의 발로 가득 찬 때는 박정희 정권이 끝난 직후인 1980년 ‘민주화의 봄’이었다. 1980년 3월 대학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봄이 무르익으면서 교내 집회를 거쳐 시내 한복판의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광화문네거리에 시위대가 진출한 것은 5월13일이었다. 막상 가두에 나서면 복잡한 노래는 부르기 힘들다. 가장 많이 부르게 되는 노래는 ‘훌라송’이라 지칭된 노래였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애국가’를 불렀다. 하지만 신문 어디에도 학생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보도가 없는데, 비상계엄하의 사전검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검열로 군데군데 허옇게 지워진 학보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극성스러운 한 선배가 교내신문사에서 검열 이전 판본을 구해다가 검열본과 대조해보았는데, 시위대 학생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구절이 삭제되었음을 발견하고 ‘별걸 다 잘랐네’라며 다들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노태우도 배웠던 ‘아침이슬’ 다른 노래에 비해 ‘훌라송’이 애창된 것은 8자의 구호를 넣기 편안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상계엄 철폐하라 훌라훌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훌라훌라’ 식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세기 영국이 아일랜드인을 자신들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몰았을 때 나온 노래 ‘조니,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Johnny, I hardly knew ye)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보며 ‘당신 눈은 어디로 갔나요’, ‘당신은 다리도 팔도 없네요’, ‘당신은 그릇을 들고 구걸을 하고 다니겠네요’, ‘조니,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라 노래하는 끔찍하고 슬픈 노래이다. 이런 반전적 가사가 미국 남북전쟁 때에는 전쟁영웅을 즐겁게 맞이하는 ‘조니가 집으로 행진하며 돌아올 때’(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로 바뀌어 불렸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도 1963년에 단성사에서 개봉한 존 웨인 주연의 영화 <기병대>(존 포드 감독, 1959)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 노래가 데모 노래의 곡조로 쓰인 것은 영국·미국식 악곡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던 전후 출생자들이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격렬한 데모 현장에서는 이 선율도 쉽지 않았던지 구전 과정을 거치며 아주 단순하게 바뀌었다. 그 덕분에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장의 중년 아저씨들도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하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정유하, <그래도 우리는 노래한다-민중가요와 5월운동 이야기>, 한울, 2017) 광화문 한복판에 사람이 다시 운집한 것은 7년 뒤인 1987년 6월항쟁 때였다.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젊디젊은 죽음이 이어진 이때 가장 안전한 공간은 명동성당을 비롯한 기독교권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명동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에서 출발하여 시청 앞과 종로, 무교동을 거쳐 광화문네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 시기 대부분의 시위 행로였다. 6월10일 시위대는 광화문네거리를 어렵사리 뚫었고 시위는 승기를 잡았다. 6·29 선언이 나온 후인 7월9일 이한열의 운구 행렬은 신촌 연세대에서 출발하여 서울시청 앞 집회를 거쳐 광주로 향했다. 시청 앞에 모였던 100만 군중은 광화문네거리로 몰려갔고 경찰은 이날도 광화문의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았다. 6월항쟁의 거리에서도 ‘애국가’와 ‘훌라송’은 당연히 불렸지만 1980년과는 달리 ‘아침이슬’의 힘이 강해졌다. 1971년 대중가요로 발표되었던 ‘아침이슬’(김민기 작사·작곡)은 유신 말기가 시작되는 1975년에 금지곡이 되면서 데모 노래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1980년 봄까지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만 즐겨 부르던 노래여서 거리의 다양한 대중들과 함께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에는 청소년 때부터 ‘아침이슬’을 익히 알았던 세대가 ‘넥타이 부대’가 되어 6월항쟁에 합류했다. 시위대의 노래가 달라진 것이다. 집권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월 말에 김민기가 속해 있던 극단 연우무대를 찾아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 트로트 가요 ‘선창’을 부르면서 ‘아들딸에게 ‘아침이슬’을 배웠는데 아직 가사를 못 외웠다’며 쑥스러워했다는 일화는 이 노래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침이슬’은 바로 며칠 전인 8월18일에 전격 해금됐다. 이로부터 몇 년 동안 시위는 그저 늘 있는 사회현상이 되었고, 세종로에서도 가끔 자잘한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 흐름은 1991년 봄 명지대 학생 강경대의 사망사건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장례 시위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듬해인 1992년에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한국 정치는 30년에 걸친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끝내게 되고, 전 세계 역시 소련의 붕괴와 함께 대대적 변화에 돌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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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90년대의 집회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 등 조직된 단체 회원들의 강철 대오 형식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중고생과 유모차 부대 등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벌이는 축제로 바뀌었다. 지난해 촛불집회도 청년 학생과 가족 단위로 나온, 비조직된 삼삼오오 대열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12월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박근혜정권 퇴진 청년행동’ 소속 청년들이 ‘청년산타 발대식’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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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처음에는 “하야 하야 하야”라는 후렴구가 인기를 끈 대중가요 개사곡이 주로 불렸지만, 점차 민중작곡가 윤민석씨가 세월호 진실 규명을 촉구하면서 만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가장 널리 애창됐다. 지난 2월4일 윤씨의 노래 가사가 레이저 광선으로 쓰여진 광화문 담벼락 아래를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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