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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23 16:47 수정 : 2017.12.23 20:04

[토요판] 이영미의 광화문시대
⑫ 광장

오랫동안 나라의 주인인 시민들에게는 금단의 지역이었던 광화문 앞 세종대로는 지난해 촛불집회를 거치면서 마침내 주인의 것으로 돌아왔다. 광화문광장에서의 한밤중 집회도 허용됐다. 2016년 마지막날인 12월31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치켜든 채 ‘송박영신’을 축하하는 폭죽을 쏘아올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시민 발길 차단했던 광화문네거리
2002 월드컵 응원부터 시민 품에
‘짱돌’ 아닌 축제 분위기 경험 공유
촛불로 ‘민주주의 1번지’ 자리매김

광장 노래도 시대변화 따라 진화
80년 ‘훌라송’, 87년엔 ‘아침이슬’
2016년 겨울 박근혜 탄핵촛불 땐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울려퍼져

세종로에 사람들이 모여 목청 높이 노래를 부르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뀐다. 바다로 납치된 수로부인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름으로써 구해냈다는 설화도 있지만,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는 모양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세종로 차도에 사람이 발조차 디딜 수 없도록 횡단보도를 없앤 점도 꽤나 징후적으로 보인다. 광화문네거리에 횡단보도를 만들기로 결정한 것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1998년이었다.

그러니 이 거리 한복판에 사람들이 걸어서 진입하는 일은 일종의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만의 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이곳이 사람들의 발로 가득 찬 때는 박정희 정권이 끝난 직후인 1980년 ‘민주화의 봄’이었다.

1980년 3월 대학 총학생회가 부활하고 봄이 무르익으면서 교내 집회를 거쳐 시내 한복판의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광화문네거리에 시위대가 진출한 것은 5월13일이었다. 막상 가두에 나서면 복잡한 노래는 부르기 힘들다. 가장 많이 부르게 되는 노래는 ‘훌라송’이라 지칭된 노래였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애국가’를 불렀다. 하지만 신문 어디에도 학생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보도가 없는데, 비상계엄하의 사전검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검열로 군데군데 허옇게 지워진 학보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극성스러운 한 선배가 교내신문사에서 검열 이전 판본을 구해다가 검열본과 대조해보았는데, 시위대 학생들이 ‘애국가’를 불렀다는 구절이 삭제되었음을 발견하고 ‘별걸 다 잘랐네’라며 다들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노태우도 배웠던 ‘아침이슬’

다른 노래에 비해 ‘훌라송’이 애창된 것은 8자의 구호를 넣기 편안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비상계엄 철폐하라 훌라훌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훌라훌라’ 식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의 원곡은 19세기 영국이 아일랜드인을 자신들의 전쟁에 총알받이로 내몰았을 때 나온 노래 ‘조니,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Johnny, I hardly knew ye)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보며 ‘당신 눈은 어디로 갔나요’, ‘당신은 다리도 팔도 없네요’, ‘당신은 그릇을 들고 구걸을 하고 다니겠네요’, ‘조니, 당신을 못 알아보겠어요’라 노래하는 끔찍하고 슬픈 노래이다. 이런 반전적 가사가 미국 남북전쟁 때에는 전쟁영웅을 즐겁게 맞이하는 ‘조니가 집으로 행진하며 돌아올 때’(When Johnny comes marching home)로 바뀌어 불렸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것도 1963년에 단성사에서 개봉한 존 웨인 주연의 영화 <기병대>(존 포드 감독, 1959)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이 노래가 데모 노래의 곡조로 쓰인 것은 영국·미국식 악곡을 편히 받아들일 수 있던 전후 출생자들이 대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이었다. 하지만 격렬한 데모 현장에서는 이 선율도 쉽지 않았던지 구전 과정을 거치며 아주 단순하게 바뀌었다. 그 덕분에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장의 중년 아저씨들도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훌라’ 하며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었다.(정유하, <그래도 우리는 노래한다-민중가요와 5월운동 이야기>, 한울, 2017)

광화문 한복판에 사람이 다시 운집한 것은 7년 뒤인 1987년 6월항쟁 때였다. 박종철에서 이한열로 젊디젊은 죽음이 이어진 이때 가장 안전한 공간은 명동성당을 비롯한 기독교권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명동이나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에서 출발하여 시청 앞과 종로, 무교동을 거쳐 광화문네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 시기 대부분의 시위 행로였다. 6월10일 시위대는 광화문네거리를 어렵사리 뚫었고 시위는 승기를 잡았다. 6·29 선언이 나온 후인 7월9일 이한열의 운구 행렬은 신촌 연세대에서 출발하여 서울시청 앞 집회를 거쳐 광주로 향했다. 시청 앞에 모였던 100만 군중은 광화문네거리로 몰려갔고 경찰은 이날도 광화문의 시위대에 최루탄을 쏘았다.

6월항쟁의 거리에서도 ‘애국가’와 ‘훌라송’은 당연히 불렸지만 1980년과는 달리 ‘아침이슬’의 힘이 강해졌다. 1971년 대중가요로 발표되었던 ‘아침이슬’(김민기 작사·작곡)은 유신 말기가 시작되는 1975년에 금지곡이 되면서 데모 노래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1980년 봄까지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만 즐겨 부르던 노래여서 거리의 다양한 대중들과 함께 부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에는 청소년 때부터 ‘아침이슬’을 익히 알았던 세대가 ‘넥타이 부대’가 되어 6월항쟁에 합류했다. 시위대의 노래가 달라진 것이다. 집권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월 말에 김민기가 속해 있던 극단 연우무대를 찾아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 트로트 가요 ‘선창’을 부르면서 ‘아들딸에게 ‘아침이슬’을 배웠는데 아직 가사를 못 외웠다’며 쑥스러워했다는 일화는 이 노래가 지닌 사회적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침이슬’은 바로 며칠 전인 8월18일에 전격 해금됐다.

이로부터 몇 년 동안 시위는 그저 늘 있는 사회현상이 되었고, 세종로에서도 가끔 자잘한 시위가 이루어졌다. 이 흐름은 1991년 봄 명지대 학생 강경대의 사망사건으로 이루어진 기나긴 장례 시위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듬해인 1992년에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한국 정치는 30년에 걸친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끝내게 되고, 전 세계 역시 소련의 붕괴와 함께 대대적 변화에 돌입하게 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집회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 등 조직된 단체 회원들의 강철 대오 형식이었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중고생과 유모차 부대 등 자발적인 참여자들이 벌이는 축제로 바뀌었다. 지난해 촛불집회도 청년 학생과 가족 단위로 나온, 비조직된 삼삼오오 대열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12월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박근혜정권 퇴진 청년행동’ 소속 청년들이 ‘청년산타 발대식’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강철 대오’ 대신 중고생의 삼삼오오 대열

문민정부 이후의 시대에도 세종로에서는 시위가 가끔 있었지만, 대규모 집회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다. 1994년 ‘지구의 날’ 행사 때 잠깐이나마 광화문네거리는 시민에게 개방됐고, 1995년 세종로, 서울시청 앞, 숭례문 부근을 시민들이 도보로 오갈 수 있는 광장으로 만드는 계획이 수립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가 이루어진 것도 그해였다. 국민의정부 시대, 대규모 새천년맞이 행사 역시 세종로 한복판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급기야 2002년 월드컵 때는 서울시청 앞부터 광화문까지의 차로가 붉은 옷을 입은 시민들의 물결로 가득 차기에 이르렀다. 정부 주도 행사도 아니고 시위도 아닌데 시민들 스스로 세종로 한복판을 광장으로 만들어버린 이 엄청난 경험이야말로 이후 일반 대중이 ‘광화문광장’의 문화를 낯설지 않게 수용하도록 한 중요한 밑바탕이었다.

월드컵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낸 그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촛불집회라는 독특한 방식의 집회가 본격화되는 시작점이다. 운동조직의 대중 동원이 아닌 온라인에서 한 누리꾼의 제안이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 몸싸움의 도구인 ‘짱돌’이 아닌 기도와 성찰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촛불이 핵심 도구가 되었다는 점, 몸싸움에 능한 성인 남자 중심에서 벗어나 중고생 특히 여학생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는 점, 따라서 ‘대오를 갖추어’ 모이는 방식이 아닌 자유로운 축제 분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에서 촛불집회는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의 집회였다. 물론 이는 모든 사회비판적 대중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하여 미리 차단하는 억압적 사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법한 신고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시위가 국민의 기본권에 따라 보호받아 마땅한 일이라 여기면, 구태여 최루탄으로 해산시키려 하고 거기에 돌과 각목으로 맞서는 식의 물리적 충돌은 애초에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후 촛불집회의 방식은 정치적 입장이나 집회 규모를 막론하고 유행처럼 번졌고, 사람들은 무언가 주장하고 싶은 곳에서는 어디서든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의 중요한 초대형 촛불집회 무대는 역시 광화문 앞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무효 촛불집회가 있었고, 2005년에는 이라크 파병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으며 인터넷과 결합하여 집회 동영상이 전국 혹은 해외에까지 생중계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는 이런 흐름이 대세로 정착했다. 10대가 주축이 되고 인터넷이 집회의 참여, 진행, 여론 형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방식이 확립됐다. 촛불집회의 단골 사회자였던 배우 권해효는 2004년 촛불집회까지는 참가자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앉았었는데, 2008년 집회에서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조직되지 않은 대오’로 바뀌었다고 기억한다.(‘촛불 사회자들이 기억하는 그때 그 촛불’, <시사인> 2017. 11.4.) 조직 지도부의 ‘오더’에 따른 ‘동원’ 방식이 아니라, 에스엔에스(SNS)나 인터넷 게시판, 카페를 통해 시위 참여 의사를 공유하고 친한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자신들의 주장을 손팻말에 써서 들고 나오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의 새로운 참가자인 ‘넥타이 부대’가 시위 유경험자 20~30대 남성이었던 것에 비해, 2008년 촛불집회의 주력부대는 ‘미친 소 미친 교육 아웃’, ‘미친 소 너나 처드삼’ 등의 발랄한 구호를 손에 든 여중생과 젖먹이를 데리고 나온 ‘유모차 부대’였다. 시위 경험이 없는 10~30대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깃발 아래서 ‘철의 노동자’ 같은 ‘올드한’ 투쟁가를 부르고 싶어 하는 아저씨 시위대와 빅뱅 리메이크 버전의 ‘붉은 노을’을 부르는 여중생들의 취향 차이는 꽤 컸다. 이런 간극을 메워준 것이 탄핵무효 집회 때부터 부르기 시작한 신곡 ‘헌법 제1조’(윤민석 작사·작곡)였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밝힌 헌법 제1조를 반복하는 가사에 간단한 악곡을 결합하여 호소력과 중독성을 모두 확보한 계산된 히트곡이었다.

지난해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에서 처음에는 “하야 하야 하야”라는 후렴구가 인기를 끈 대중가요 개사곡이 주로 불렸지만, 점차 민중작곡가 윤민석씨가 세월호 진실 규명을 촉구하면서 만든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가 가장 널리 애창됐다. 지난 2월4일 윤씨의 노래 가사가 레이저 광선으로 쓰여진 광화문 담벼락 아래를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광화문 울린 윤민석의 노래

세월호 사건 이후 광화문광장은 더욱 뜨거워졌다. 2014년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인파로 꽉 찬 광화문광장은 그저 안타까웠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기독교 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교황의 행렬에 수도의 핵심 거리를 내주었다는 것도 ‘과한’ 일이었는데, 게다가 신도도 아닌 시민들까지 합세해 열광적으로 환호한 현상은 분명 정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집요하게 덮어버리려는 세월호 문제를 교황의 힘에 의탁해 수면으로 끌어올리려는 안타까운 절규였다.

이렇게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광화문 천막에서 2년 반을 목숨 걸고 버텼기에 2016년 겨울 광화문의 촛불은 다시 타오를 수 있었다. 이제 여중생과 아이 엄마는 물론 조부모에서 어린 손녀까지 일가족이 함께 집회에 참여했고, 조직도 없이 참가한 그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공유해 국회·헌법재판소·청와대·언론의 움직임까지 계산하며 정교하게 움직이는 놀라운 집단지성을 보여줬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2016, 윤민석 작사·작곡)

지난해 늦가을 광화문에 몰려나올 때에는 ‘하야 하야 하야’ 하는 작자 미상의 풍자적 개사곡을 부르던 시위대는 겨울이 깊어가면서 히트곡 제조기 윤민석이 내놓은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가슴이 울컥거리는 경험을 하였다. 간명한 네 문장의 가사, 구절마다 상행하며 감정을 점층시키는 단순한 선율은 ‘헌법 제1조’처럼 감동과 중독성을 함께 지닌 히트곡이었다. 이렇게 광화문광장에서 ‘송박영신’(送朴迎新)의 망년회를 한 지 꼭 1년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 ‘이영미의 광화문시대’는 이번 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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