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2 20:02
수정 : 2017.08.02 20:08
|
사진집 <머치 러브드>(Much Loved). 사진가 마크 닉슨이 낡은 곰인형들을 찍고 주인들한테 사연을 기록한 프로젝트의 결과물.
|
[ESC] 소영이의 반려인형
|
사진집 <머치 러브드>(Much Loved). 사진가 마크 닉슨이 낡은 곰인형들을 찍고 주인들한테 사연을 기록한 프로젝트의 결과물.
|
내가 처음 곰인형 연남이를 만난 곳은 백화점 완구점이 아니다. 집 앞 헌 옷 수거함에 누군가 갖다둔, 초췌한 모습으로 만났다. ‘유기 곰인형’이었던 것이다. 앗, 누가 버렸지! 꼬질꼬질 때가 묻은 곰인형이 어찌나 눈에 밟히던지, 그냥 놔두면 쓰레기장으로 가겠다 싶어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어. 넌 우리 집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퇴근길에 데려온 커다란 곰인형을 목욕시켰더니 몰라보게 하얘졌다. 연남동에서 주웠으니까 이름을 연남이라고 부르라며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에 정말로 연남이가 됐다. 얘를 누가 버렸을까. 헤어진 연인의 선물이었을까? 이사를 앞두고 아이 방을 정리한 걸까? 버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을까?
연남이는 우리 집에 와서 새 삶을 찾고 제주도에도 놀러 가고 온갖 사진을 찍고, 무려 페이스북에 ‘연남이와 술빵이’라는 페이지의 주인공도 됐지만 모든, 특히 커다란 곰인형의 운명이 연남이와 같진 않다. 천년만년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큰 덩치가 때가 되면 짐이 된다.
‘아름다운가게’에서도 곰인형을 만난 적이 있다. 보자마자 보기 드문 디자인때문에 눈길이 쏠렸다. 데리고 왔다. 지금은 어머니의 반려인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집에서조차 그다지 애정을 받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 가던 곰인형이 있었다. 이름은 ‘흰자’였는데,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예뻐하기에 입양을 보냈다. 요새는 ‘햇살이’로 개명한 뒤 새 삶을 찾아 즐겁게 지낸다. 친구가 가끔씩 햇살이의 사진을 보내주면 나도 기쁘다. 햇살이는 그 친구와 함께 늙어, 아니 낡아갈 것이다.
연남이와 함께 누워서 <머치 러브드>(Much Loved)라는 사진집을 들여다본다. <테디 베어의 사랑법>이라고 번역된 책으로, 사진가 마크 닉슨이 낡디낡은 곰인형들을 찍고 주인들한테서 사연을 받아 기록한 프로젝트다. 수십년 동안 간직한 인형만이 가능한 닳아빠진 모습은 제목 그대로 ‘넘치게 사랑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유기견이 청와대의 ‘퍼스트 도그’가 되는 시대다. 지겨워진 곰인형이라도 버리기 전에 깨끗이 목욕시켜서,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면 좋겠다.
정소영(출판 편집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