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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03 19:44 수정 : 2018.01.03 20:09

[ESC] 소영이의 반려인형

태평한 술빵이.
20년쯤 전, 걱정 많은 초등학생이던 나는 곰 인형이 낡은 게 큰 고민이었다. 자주 만지작거리는 부분은 털이 다 빠지고 실밥이 드러났다. 그뿐 아니라 아예 천에 올이 나가기 시작해 오래 신은 양말 뒤꿈치처럼 아른아른해졌다. 뭉툭한 꼬리도 있었는데, 하도 잡아당겨서 늘어날 대로 늘어나 끊어질 것 같은 위기 상황이었다. 큰일 났네. 한두 군데 꿰맨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것 같은데… 어쩌지? 정말 어떡하지?

당시에도 곰 인형의 반려자로서 정체성이 확고하던 나는 새해 결심으로 비장한 계획을 세웠다. 곰 인형 ‘겨울잠 재우기’. 한시도 손에서 놓은 적 없이 어디든 늘 데리고 다니고 매일같이 놀고 만지작거리며 안고 자던 곰 인형을 텔레비전 위에 고이 올려두고 바라만 보겠다고 결정하다니. 하루에 30분씩만 데리고 놀 수 있다고 정했던가. 구체적인 규칙은 기억나지 않지만 눈물겨운 시도였다. 자린고비 저리 가라 할 인내심이 필요했다.

‘곰 인형이랑 놀고 싶다.’ 눈에 보이는 존재를 두고 이 강렬한 욕망을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그러니 애초에 살살 다루지 왜 낡게 만들었냐며 자책하기도 하고, 겨울잠에 들었으니까 깨우면 안 된다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면서 버티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잠깐 꺼내서 데리고 놀다 보면 다시 올려놓기가 참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헛된 계획 때문에 괜한 마음고생을 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개학이 되면서 봄이 찾아오듯 곰 인형도 겨울잠에서 깼던 것 같다. 그렇게까지 오래 버틴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몇년 뒤 그 곰 인형을 잃어버렸다. 낡을세라 걱정한 일은 정말로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1월이 되면 강박에 시달린다. 다이어리 첫 페이지, 달력 첫 장에는 글씨도 잘 써야 할 것 같고, 새해니까 운동도 시작하고 가계부도 쓰고 근검절약도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여러모로 새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마음이 과하게 든다. 이런 내 경직된 새해맞이를 자제하도록 해주는 것은 곰 인형 술빵이의 태평한 모습이다. 언제까지 내 곁에 있을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곁에 있으니까. 너무 쥐어짜듯 계획 세우고 전전긍긍하지 말라고, 오늘 하루를 적당히 편안히 보내자고 권하는 것 같다.

정소영(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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