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9 19:38
수정 : 2017.11.29 20:22
|
양정아씨가 프랑스 루아르 지역 와이너리에서 숙성 중인 와인을 바라보고 있다. 양정아 제공.
|
이동섭의 빠담빠담
|
양정아씨가 프랑스 루아르 지역 와이너리에서 숙성 중인 와인을 바라보고 있다. 양정아 제공.
|
“낯선 사람 앞에서 말 한마디도 못했었는데, 와인 덕분에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와인을 칭송한 ‘아모레퍼시픽’ 마케팅 커뮤니케이션팀 양정아(32) 과장은 와인에 퐁당 빠진 계기를 8년 전쯤, 친구와 함께 마신 와인 ‘랜초 내파’(Rancho Napa)의 놀라운 반전 덕분이었다고 한다. 첫맛은 향이 강하고 진해서 별로였지만, 몇 시간이 지나자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운 맛과 향의 와인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에게 새로운 미각의 세계가 열렸고, 와인에 대해 더욱 깊이 알고 싶어졌다. 와인은 생산 지역, 포도 품종, 빈티지 등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술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았으나, 알면 알수록 신세계였다.
“와인으로 만드는 포도 품종만 해도 1만종이 넘고, 같은 품종이라고 해도 지역, 생산자, 시기에 따라 맛이 달라져요. 또한 맛이 강한 와인도 오래 열어놓으면 한결 부드러워지고, 똑같은 와인도 개인의 기호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느껴져요. 그래서 와인을 단순히 ‘술’이라 하기엔, 한병 한병이 모두 각자의 개성이 담긴 사람 같아요. 그것이 제가 와인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고요.”
와인을 사람에 비유한 양씨는 ‘와인이 있는 자리’도 좋아한다. 와인을 함께 마시고,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같은 품종으로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와인들, 예를 들면 프랑스 부르고뉴의 피노 누아르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피노 누아르를 비교해서 마시면서 같은 듯 다른 와인의 맛을 알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에게 와인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위로받는 자리를 만드는 매개체다.
“와인을 알게 되어 제 삶이 풍성해진 것은 좋은데, 숙취를 얻었죠.”(웃음)
|
안 그로와 함께 와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양정아씨. 양정아 제공
|
빛이 진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그의 삶이 풍성해졌다는 말에는 와인으로 의외의 사람들과 맺어진 뜻깊은 경험도 담겨 있다.
“작년엔 프랑스 부르고뉴로, 올해는 루아르 지역의 와인 생산지로 여행을 다녀왔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 생산자 안 그로를 만나고 싶어 전자우편을 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찾아갔어요. 안 그로에게 줄 선물을 들고요. 첫날은 허탕 쳤지만 다음날 운 좋게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안 그로가 한국에 왔을 때는 연차를 내고 만나러 갔고, 그렇게 몇 번의 만남과 대화 끝에 지금은 친구가 되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쓴 작가를 만나는 기쁨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심지어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데도 와인에 대한 애정 하나로 그와 친구가 되었다니, 그를 ‘성덕’(성공한 덕후)이라 부를 만하다.
“프랑스 루아르 지역에서는 벼룩시장에서 샀던 와인이 너무 맛있어서 장대비를 뚫고 그 와인에 적힌 주소로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어요. 유명한 와이너리도 아니었고 루아르 포도밭들 사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곳이었어요. 그렇게 생산자를 만났는데, 서로 말이 안 통하니까 그림과 불어와 영어의 번역기를 돌려가며 한참을 자신의 와인에 대해 설명해주더군요.(웃음) 그 열정이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이렇게 열정과 자부심을 갖고 와인을 생산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봤기에 양씨는 현재 한국에서 와인이 ‘비싸고 고급스러운 술’로 주로 소비되는 상황이 안타깝다. 어떤 와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혀에서 느껴지는 맛은 물론이고 가슴으로 전해지는 생산자들의 철학에 공감한다는 뜻 아닐까.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그날의 위로가 될 수 있는 와인이고, 가장 싫어하는 와인은 명성이 자자해서 큰마음 먹고 비싼 가격에 구입했는데 실망한 와인이에요.”
무엇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제대로 즐기는 사람이 매력적이다. 와인을 향한 양씨의 매력에 전염되어서인지 내게 새로운 미각의 세계를 열어줄 와인을 찾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와인을 마시며 나이 들어가는 것, 너무 낭만적이지 않나. 꼭 와인이 아니어도 좋다. 그래도 가끔은 와인이라서 더 좋은 자리가 있다.
이동섭(예술인문학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