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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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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치 오누이 ‘백장미 저항운동’
뮌헨 지역에 통신문 돌리다 체포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이 몇천명의 마음을 움직일테니”
영화속 백장미 메시지는 흐릿할 것이다
지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지금 도쿄에서는 <백장미의 기도>라는 영화가 로드쇼 공개중이다. 한국에서도 공개됐는지 모르겠다. 지난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독일에서는 관객동원 1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영화의 원제는 <조피 숄, 최후의 나날들(Sophie Scholl-Die Letzen Tage)>이다.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은 오빠인 한스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그들 남매와 ‘백장미’ 저항운동이 영화화된 것은 이번이 세번째. 이전의 두 작품은 모두 1982년작이다. 이번 작품의 특징은 독일 통일 뒤 공개된, 옛 동독에 보관돼 있던 심문기록을 충실하게 수용해 제작했다는 점이다. 가능한 한 곁가지들을 빼고 조피가 체포당한 뒤부터 처형될 때까지의 짧은 나날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취조실에서 펼쳐진 게슈타포(국가경찰) 심문자와 조피의 대결 신에서는 숨막힐 듯한 현장감과 양질의 무대극을 보는 듯한 극적 긴장을 느낄 수 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무엇인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조피 숄에 대해 나는 각별히 깊은 생각을 품고 있는데, 일찌기 <지나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다룬 적도 있다.
조피의 마지막 나날들을 아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취조가 끝난 뒤도 잘 잤고 처형 직전의 면회에서도 부모가 갖고 온 과자를 맛나게 먹어치웠다고 한다. 민족재판소 법정에서 그는 판사와 배심원을 향해 “이제 우리는 처형당하지만 다음은 여러분들 차례입니다”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조피와 같은 감방에 있던 여성 수형자 엘제 게벨은 그가 한 최후의 말을 전한다. “내겐 죽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행동이 몇천명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반드시 학생들의 반란이 일어날 거예요.” 이에 대해 게벨은 말한다. “오 조피야, 너는 아직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겁많은 짐승인지를.” 그의 말대로 조피가 기대한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조피 처형 3일 뒤 대학 강당에 소집된 학생들은 백장미를 매도하고 나치 학생지도자 연설에 환성을 지르며, 조피를 게슈타포에게 넘긴 직원에게 갈채를 보냈다. <백장미는 지지 않는다>는 책이 있다. 조피의 언니인 잉게 숄이 남매에 대한 회상을 기록한 책으로, 원서는 1955년에 간행됐고 일본어판(미래사 펴냄)은 1964년에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971년 간행의 제9판. 유신독재체제하의 한국에서 모국유학생이었던 나의 형 두사람이 투옥당한 해였다. 당시 나는 도쿄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20살이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옥중의 형들을, 그리고 조국에서 군정에 저항하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랬던 것이다. 그때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났다. 백장미가 남긴 메시지는 지금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독일과 같은 제2차대전 패전국이면서 우파가 힘을 얻어 과거 역사를 찬미하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는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지금 일본에서는 <사나이들의 YAMATO(야마토)>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하고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의 특공대를 센티멘털하게 그린, 자기애의 표본이라고나 할 어리석은 작품이다. <백장미의 기도>가 히트하는 독일과의 낙차는 명백하다. 그러나 이번 영화 <백장미의 기도>가 무조건 좋은 작품인지 묻는다면, 나는 몇가지를 유보해 놓고 싶다. 이것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지만 주의깊게 지성을 발휘해서 봐야 한다. 특히 현재와 같은 세계정세 문맥속에서는.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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