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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6 16:21 수정 : 2006.02.17 16:48

역사로 보는 한주

1998년 2월19일 18살 때 일본으로 귀화한 뒤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으로 살고자 열망했던 재일조선인 출신 자민당 중의원의원 아라이 쇼케이(1948-1998)가 도쿄 시내 퍼시픽도쿄호텔 방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방에는 많은 위스키 빈병들이 늘려 있었다. 그는 그날 밤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너는 아직 일본에 있었는가. 이런 나라에 집착하지 말고 더 큰 나라에서 활약할 생각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는 말을 남겼다.

97년 12월22일 조간신문에 ‘니코증권, 아라이 쇼세이 의원에게 이익제공’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뜬 이래 매스컴은 아라이가 니코증권에 부정한 이익제공을 요구했고 주식 매매를 반복하면서 수천만엔의 이익을 올린 혐의들을 집중 보도했다. 그 무렵 일본 4대 정권의 하나였던 야마이치 증권 파산충격이 열도를 흔들었다. 야당은 아라이의 검찰 증인 출두를 요구했고 자민당내에서도 자발적 탈당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16살 때까지 나는 재일조선인이었다”, “몇 백명의 국회의원이 나와 똑같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내 주식거래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차별 아닌가”라고 그는 항변했다.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 3세. 본명 박경재. 평소 아라이 다케시라는 일본명으로 생활했다. 66년 가족 모두가 귀화한 뒤 67년 도쿄대에 진학해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신일본제철을 거쳐 대장성에 들어가 출세길에 올랐으나 그것은 곧 불행의 시작이었다.

잘 나가던 그가 83년 일본정계 실력자 와타나베 미치오 심복으로 중의원 선거 도쿄 2구에 출마했을 때 대항마는 지금의 도쿄도 지사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였다. 그때 이시하라의 비서가 아라이의 정치광고 포스터 3천여장에 ‘66년 북한에서 귀화’라는 내용이 적힌 검은 스티커를 붙였다. ‘승공연합의 첩자’라는 협박장이 사무실로 날아오고 가족들은 ‘조센진 스파이’라는 유언비어들이 나돌았다. 원 국적(조선)이 기록된 호적원본 복사본이 유권자들에게 우송됐다. 결국 아라이는 첫 출마에서 참패했다. 86년 선거에서 재기한 아라이가 자신의 ‘이질적인’ 출생 조건을 살려 일본의 국제화 기수로 자신을 내세우자 이시하라는 끝까지 비열했다. “한일관계에선 심한 마찰이 생겼을 때 과연 어느 쪽 국익을 우선할 것인가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라이씨의 원 국적이 북쪽인지 남쪽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일본과 한국 사이에는 교과서문제나 독도 영유권 문제가 있고 어업권도 언제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북쪽은 일본을 적대시하는 나라지요. …귀화했다고는 하지만 원 조국에 대한 애정이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두 개의 조국 사이에 끼여 본인도 괴로울 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핏줄을 혐오했던 아라이는 끝내 그 핏줄 때문에 좌절했다. 이시하라의 일본은 변함없다.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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