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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6 17:37 수정 : 2006.02.17 16:51

그림자의 짧은 역사
빅토르 스토이치타 지음. 이윤희 옮김. 현실문화연구 펴냄. 1만5000원

그림자가 서양예술에 끼친 영향을
그리스·로마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네·고흐·뒤샹등 통해 풀어내
피카소에게 그림자는 신체를 만드는 방법이자
해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로마와 파리에서 공부한 스위스 프리부르대학 미술사학과 교수 빅토르 스토이치타의 <그림자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he Shadow)>는 말 그대로 그림자의 역사를 다루되 그리스 로마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서양 예술, 특히 그림(회화)에 나타난 그림자들을 중심으로 그것을 풀어간다. ‘짧은’ 역사라고 했으나 결코 짧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많은 그림과 사진과 전적들을 동원한 방대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림자의 기원에 관한 신화들이 드러내주는 문을 통해 서양 재현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리고 “서양문화에서 재현에 관한 담론의 중심에 있는 그림자에 대해 숙고해보려는 진정한 시도”로 그림자의 역사에 천착한 저자는 이 책이 그런 방면의 주제를 일관된 방법으로 수행한 최초의 연구서라고 자부한다.

그림자에 관한 일관된 최초의 연구

코린트 시키온의 도공 부타데스에서부터 플라톤, 지오토, 마사치오, 푸생, 그리고 르누아르, 모네, 고호, 뒤러에서 피카소, 니체와 지오르조 데 키리코와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또 페터 슐레밀과 피터팬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각기 독특한 숱한 그림자들과 함께 등장한다.

서양 회화와 조각은 벽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그린 이미지 재현물(복사물)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나오는 도공 부타데스는 자기 딸이 애인의 얼굴에 램프 불빛을 비추어 벽에 그림자를 만들고는 그 그림자의 외곽선을 따라 그림을 그리자 거기에 진흙을 발라 부조를 만들었고 그것을 다른 도기들과 함께 구워냈다. 나폴리만 해군 제독으로 재임 중이던 서기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때 현장에서 관찰과 인명구조 작업을 벌이다가 화산가스에 질식돼 숨진 박물학적 지식의 소유자인 로마 정치가 플리니우스는 부타데스의 예를 들면서 그리스에 회화기술이 전해지기 6천년 전에 이미 이집트인들이 회화를 발명했다는 설을 부인한다. 그러나 파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원전 1400년 무렵의 이집트 그림 ‘새벽에 무덤에서 나오는 영혼과 그림자’에는 측면과 정면의 시점이 혼합돼 있는 독특한 이집트 벽화그림의 전형에 가까운 검은 단일색의 인간이 또렷하게 그려져 있다.

앤디 워홀, <그림자>(1981). 자신의 얼굴과 옆모습 그림자 이미지를 담았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합화된 인간의 긴장되고 극적인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부타데스 얘기는 <웅변교수론>을 쓴 퀸틸리아누스와 아테나고라스, 그리고 어윈 로데의 연구로 이어지고 점차 풍부해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더해간다. 부타데스 다음에 등장하는 얘기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다. 예술적 재현의 탄생을 다룬 플리니우스나 인지적 재현의 탄생을 다룬 플라톤의 얘기는 모두 ‘투영’이라는 모티프에 집중돼 있고 거기에는 그림자 이미지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림자 이미지가 거울 이미지로 넘어가고 죽음에 이른 자기애를 상징하는 나르키소스가 등장하면서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와 안토니오 템페스타, 리롤라모 모체토의 나르키소스 그림들이 펼쳐지며 그것은 곧 샤넬의 애프터셰이브 제품 광고 얘기와 대비된다. “이 광고에서 우리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서 애프터셰이브 병을 빼앗기 위해 자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는 젊은이를 보게 된다. 이 시나리오는 오비디우스 신화의 둘째 부분에서 보았던 것과 극적으로 대립한다. 사람과 그의 그림자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는 행위는 더 이상 (나르키소스와 같은) 사랑이 아니라 경쟁에 집중된다. 사실상 이 싸움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성과의 관계에 근거를 둔다. 이 현대의 나르키소스(에고이스트)는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질투한다. …젊은이와 그림자가 만나는 땅바닥은 그 둘이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서로 너무나 달라 보이는 그들의 공격적 상반신 자세는 (잠재의식적 차원에서) ‘타자’와의 싸움이라는 개념을 요약해 주고 있다.”

그림자 이미지가 거울 이미지로

측면의 윤곽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자 이미지가 정면의 실상을 반영하는 동일자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거울 이미지로 변형되고 그것을 토대로 한 회화론(미술론)이 탄생한 것은 르네상스기였다.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지오 바사리는 두 이미지, 그림자 단계와 거울 단계를 통합하고자 했다.

서양 미술에서 그림자는 “신체와 입체감과 살덩이의 확인”으로 나타났고,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두가지 예, 즉 성육신(수태고지)과 관련된 마사치오와 라피, 얀 반 에이크, 콘라드 비츠, 마에르텐 반 헴스케르크의 그림들, 그리고 ‘작자(화가)의 현존’을 그림자를 통해 드러내는 인상파와 입체파 그림들을 등장시킨다. 에밀 졸라의 <작품> 주인공 가게르가 자신의 ‘인상주의적’ 꿈을 묘사하는 장면과 함께 등장하는 르누아르의 <퐁데자르>, 모네의 <릴리 연못 위에 드리워진 모네의 그림자>와 <수련>, 피카소의 <피카소의 실루엣과 울고 있는 여자>와 <슬픔에 빠진 어린 소녀>와 <화가와 모델>에 묘사된 그림자들은 각기 전혀 다른 형상과 이미지들을 지닌 화가 자신들의 재현, 즉 자화상들이다. 피카소에게 그림자는 신체를 만드는 한 방법이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박학다식한 ‘구라’

‘절대적이고 무한 반복되는 모든 사물들의 순환’이라는 니체 철학에 심취한 키리코, 그리고 뒤샹의 영향을 크게 받은 앤디 워홀의 <그림자들> <그림자> <자화상> 등은 단순화와 역전, 네거티브 변형과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플라스틱화·이미지 중합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워홀은 이탈리아 대가의 그림자 이야기들을 이야기 없는 그림자로 대체했고, 그 작품들의 연속성은 회화적 서사의 최종적인 죽음과 무한한 회절에 의한 대체, 그리고 외관의 영원한 흐름에 대한 반영일 뿐이다.” “인생도 스스로 반복되면서 변화되는 이미지들의 연속 아닙니까?”

“때아닌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를 이끌고 가는 가엾은 사람의 그림자를 생각하게” 하는 고호의 <타라스콘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예술가-화가>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반 고호의 초상화에 대한 습작>, 관음주의적 시선이 짙은 피카소의 <여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림자>, 자크 드 헨2세의 <숨겨진 보물을 찾는 세 마녀>로 대표되는 그림자의 악마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과 <노스페라투, 새벽의 심포니> 등의 영화들, 그림자와 싸우는 만화 <럭키 루크> 등 그림자를 매개로 한 스토이치타의 박학다식 천의무봉한 ‘구라’는 끝이 없다.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재, 가볍지 않은 주제인 만큼 서양문화에 대한 인식지평을 넓이는데는 제격인듯하나 필자 같은 천학비재들에겐 소화해내기가 만만찮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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