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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16 19:25 수정 : 2006.02.20 10:04

개항 이후 서양의학의 수입은 인구를 늘리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절대적인 국가의 과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1885년 제중원의 설립 또한 이와 관련돼 있다. 알렌과 미국 선교회는 이런 의도에 맞춰 조선 정부에 도움을 주고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서양의학·종두법 도입의 ‘신화화’엔
선교와 식민통치 정당화를 위한
미·일의 불순한 동기가 숨어 있다
불안했던 조선 지배층의 의료근대화
과학을 원했지만 과학을 몰랐다


의학속 사상/(18) 개항 이후 서양 근대의학의 수입

“알렌은 지금 자기 앞에 이 나라의 거물 인사, 보수당의 거두가 누워 있고, 그가 생사의 지척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알렌은 수술용 가방을 열었다. 이 수술이 반드시 성공할 것이고, 기독교와 진보는 그 빛나는 성공의 결실로 이 나라에서 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겼다. 이 극적인 장면은 한국의 근대사에서 그 서사시로서나 시나리오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묵시록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과 기독교, 그리고 미국의 이상이 한국에 그 피와 골수 속에서 새 활력을 환기시키는 역사의 동력으로 환영받기 시작한 때의 모습이 이러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지금껏 실시되어 오던 어떠한 한방 치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의술이었다.”(민경배, 1991)

“이런 비과학적인 분위기 중에 홀로 빛을 떨친 것은 이조말 ‘조선의 제너’라 불리우는 송촌 지석영 선생이다. 그는 일찍이 종두법에 관심을 가지고 과학적으로 논술된 책을 입수하여 감명 깊게 읽었으며, 1779년 겨울 부산에 가서 일본 해군 군의 토츠카씨에게 종두의 핵심을 배워 이를 각도에 전파하여 조선 민중을 천연두의 참해로부터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종두의 과학적 효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민중은 도리어 이를 외국의 마술, 사법으로 간주하여 심하게 배척했다. 그러나 서서히 8도의 문화도 날로 그 면목이 쇄신하여 지난날에 사술로 매도되었던 종두법이 이제는 하늘이 내린 복음으로 이해되어 전 도가 모두 그 혜택을 받기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모두 지 선생의 피땀 어린 노력과 고군분투에 힘입은 것이라 생각한다.”(시게무라, 1934)

필자는 현대 한국에는 서양의학의 도입과 관련된 두 개의 신화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알렌 신화’다. 위의 첫번째 인용문은 바로 이 ‘알렌 신화’를 말하고 있다. 그 신화는 “알렌과 미국 기독교 선교사 조선의 서양의학을 가져다주고 그것이 이후 한국의학의 뿌리가 됐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미국과 기독교의 근대적 은총을 핵심으로 하는 ‘알렌 신화’는 후대 한국의 교회사 연구자들이 알렌의 일기와 자서전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석영 신화’다. 두번째 인용문은 바로 이 ‘지석영 신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화는 “조선인 지석영이 일본의 도움을 받아 조선 최초로 우두법을 익혀 전국에 퍼뜨렸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지석영 신화’는 1920년대 말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통치자가 ‘조선 우두법 도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우두법 도입에 결정적인 조력을 한 사실을 부각시켜, 식민지 통치의 정당화를 선전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강한 군대 위한 의학수입


이 두 신화는 개항 이후 조선의 서양의학 수입에 대해 세 가지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다. 서양의학을 좁은 의미의 병원과 우두법 정도로만 국한시킨다는 점이 그 하나고, 그것이 몇몇 특정 인물의 희생으로 이룩된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는 점이 다른 하나다.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정부의 무능을 부각시키는 대신, 일본 군진의료나 미 선교의료의 제국주의적 동기를 감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알렌, 지석영
사실 개항 이후 서양의학의 수입은 인구를 늘리고 군대를 강하게 하는 절대적인 국가의 과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인구를 늘리거나 전투력을 향상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위생학과 외과술의 도입,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보건의료의 조직이 필수불가결했다. 알렌과 지석영의 활동은 모두 이런 네트워크 안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알렌의 경우 그의 입국은 김옥균의 병원 설립 구상과 관련돼 있었던 것이며, 1885년 제중원의 설립 또한 조선정부의 서양의술 병원 건립과 관련돼 있었던 것이다. 알렌과 미 선교회에서는 이런 의도에 맞춰 조선정부에 도움을 주고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지석영의 경우에도 그가 1882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것도 김옥균의 배려였으며, 1885년 우두교수관 자격으로 우두법을 교육시키고 시술했던 것도 조선정부의 우두 행정의 일환이었다. 곧 이 둘은 백지 상태에서 제중원 건립을 이끌어내고, 우두법 제도를 정착시킨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정부의 근대화를 위한 의료 활동과 제국주의적 의료 활동이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적 보건의료가 조선인과 조선 정부를 맘대로 휘두른 것이 아니었고, 외국의 선진적인 의료가 액면 그대로 조선의 근대화의 자양으로 흡수된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결합, 절충하는 모습을 띠었다.

제중원의 경우 1885년 조선정부의 경제적 이익과 선교회의 기독교 포교를 위한 열망이 부합된 형식으로 탄생했다. 그러던 것이 1894년 선교회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자 둘의 결별이 있게 됐다. 우두법의 경우 1879년 지석영의 우두법 학습부터 시작해서 1897년 후루시로의 종두의양성소 운영 때까지 일본은 조선정부에 대해 기술과 교육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선을 준식민지로 만든 이후에는 조선의 보건의료를 틀어쥐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형태로 재편했다. 곧 조선 정부가 주체적 능력이 있었을 때에는 미 선교회와 일본 제국주의 보건의료일지라도 정부 활동의 보조적 기능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는 달랐다. 미 선교회는 곧바로 자신의 독자적 활동에 나섰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뒤 그 자신이 주체로 올라섰다.

개항 이후 일제 강점 이전까지 이른바 서양식 근대보건 의료제도의 확립과 그것의 기반이 되는 서양의 위생학과 의학의 학습이 뒤따랐다. 그것은 알렌이나 지석영의 활동 정도가 아닌, 전면적인 것이었다. 적어도 법적, 형식적으로는 서구의 보건의료체제와 별로 다름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갑신정변 이후 세 분야의 시험 운영, 곧 우두법 실시, 제중원 운영, 검역 실시 등의 단계를 거쳐 갑오개혁 때 전면적인 서양식 보건의료제도로 바뀌었다. 천년 이상 지속돼온 봉건적 제도가 붕괴됐고 오늘날과 유사한 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한제국이 들어선 뒤에는 보건, 의료, 의약 관련 부문의 법제화가 이뤄졌으며, 의학교가 설치돼 본격적 인력 양성에 들어갔다.

이제 개항 이후 서양의학 도입 상황을 결산해보자. 우선 조선 정부 활동의 한계와 제국주의적 의료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 정부의 서양 치료술과 우두법의 도입은, 일본과 같이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서 볼 때, 너무나 소극적이고 불철저했다. 공고한 국가 제도의 확립과 보건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인력의 재생산 구조의 확립을 목표로 하지 못한 임시방편적인 데 지나지 않았다. 조선의 지배층은 과학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했지만 과학 활동의 본질에 대해 거의 무지했다. 보건의료를 근대화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안정적으로 펼칠 만한 권력의 안정성이 없었다.

위생학과 외과술의 두 얼굴

신동원/카이스트 연구교수·과학사
미국이나 일본이 펼친 보건의료가 상대적으로 넓은 공간을 차지하게 된 것은 이러한 조선 정부의 한계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한계가 제국주의적 보건의료 활동의 모든 것을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 미 선교회의 의료 활동은 인도주의적 박애정신의 실천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조선인의 기독교 개종과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중요한 목표로 삼았다. 일본의 보건의료 활동은 제국주의적 지배를 현실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다 더 나아가 식민 통치의 탄압 수단으로 활용됐다. 서양의 위생학과 의학은 개인 차원에서 삶의 질을 개선시키고 수명을 연장시켜주고 국가 차원에서 인구를 늘리고 강병을 이룩하게 하는 대단한 선물임에 틀림이 없었다. 동시에 제국주의적 지배를 원활하게 하는 효과적 권력 수단이기도 했다. 지석영 위생학과 알렌의 외과술은 이 두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newsdw@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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