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2.23 17:50
수정 : 2006.02.24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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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이정우 지음. 도서출판 아고라 펴냄.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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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독서
첫 경험. 흔히 키스나 첫날 밤을 연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이 태어나 돌아갈 때까지 처음하는 경험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글, 아니 문자와의 첫 경험은 뜻밖이다. 언제였더라?
저자의 기억은 유난히 선명하다. 어릴 적 충청도 영동 산골에서 ‘각세교의 접주’였던 할아버지댁의 벽지에 씌여 있었던 ‘일종의 태극도’ 속에서 첫 글자(한자)를 만났고, 국어학자이자 한학자였던 아버지가 지은 가사(歌사)가 처음 읽은 책이었다.
그렇게 유년의 추억담으로 시작하는 이 독서 에세이는 한 철학자의 지적 성장기이자 인류가 이룬 지식과 사상의 발달사로 거침없이 깊어진다. 1부 ‘문학과 더불어’는 중2 때부터 3년간 아버지의 서재에 파묻히게 했던 소설과 열정의 기록이다. 2부 ‘과학의 세계’와 만남은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가문의 열망’인 의사가 되기 위해 이과를 택하면서 이뤄졌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경제학의 핵심 개념을 수식과 그래프까지 동원해 설명하는 저자는 그 선택이 더 넓은 사유의 세계로 이끌었다고 감사해한다. 3부 ‘철학 마을 가로지르기’에서 큰스승 소운 박홍규 선생을 만나 비로소 “사유를 시작했다”고 고백한 저자는 어느새 자신의 책, 자신의 학문 세계를 펼쳐보인다. 그가 2000년 서강대 교수직을 버리고 철학아카데미를 창립해 ‘현실의 철학’을 찾아 지적 유랑을 하는 이유도 자연스럽게 와 닿는다.
“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할 수 있었다. 그후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웠다. 더 나아가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 능력을 얻었다. 그 많은 책들이 내 마음에 심어준 여러 생각들, 지식들이 없었다면 삶이란 얼마나 공허한 것이었을까.”
새 책을 구입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의 하나라는 저자는 ‘직장인 한달 평균 독서량 1.5권’의 책 안읽는 사회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희귀 활자족’의 표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 ‘유목적 사유의 탄생’은 ‘유목적 사유를 하는 사람의 탄생’으로 읽힌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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