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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1만3천원 |
두레공동체 꾸리는 재야 농사꾼 천규석씨
“국익 위한다며 생명주권 버리는게 진보인가”
생산성 낮고 약탈적인 ‘유목’ 실랄한 비판
희망은 쌀과 농업 기초한 자급·자족·자치
몽골 유목민들이 땅 1㏊(헥타르=1만㎡)의 10분의 1인 10a(아르=100분의 1㏊)에 목축을 할 경우 토끼 한 마리 기르기도 어렵다. 그런데 같은 면적에 벼농사를 짓는다면 벼 단작만으로도 736.7㎏의 알곡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지금의 곡류 소비량 기준으로 적어도 5-10명의 1년 식량이 되며 거의 모든 칼로리를 곡류에만 의존했던 전통시대에도 2명 이상의 1년 식량이 된다.
1990년에 도시-농촌 직거래를 통한 지역자립 자치두레를 되살리자는 ‘한살림 운동’에 참여한 이래 한살림 운동 대구공동체를 만들고 경남 창녕 남지에 ‘공생농 두레농장’을 연 ‘진짜 재야’ 농사꾼 천규석(68).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쌀과 민주주의> 등에 이어 나온, 한층 더 거침없고 신랄해진 그의 다섯번째 책 제목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 펴냄). 유목사회의 근본적 한계는 몽골 유목민의 예에서 보듯 낮은 생산성이다. 그 때문에 경제적 불안정과 비자급성을 피하기 어렵고, 이를 극복하려면 정착 농경사회와 물자를 교환하거나 아예 이주해서 정착민화하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끝없는 이동과 전투적 기동성, 침략, 약탈 등 유목민적 특성도 거기서 비롯된다.
지역개발이란 이름의 지역파괴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저자의 선언은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은 애써 외면”하는 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유목주의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휘어잡고 있다. 밖으로는 유일 초대국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 안으로는 거기에 추수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보상금 타먹고 체제 안에 들어간 옛 민주투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도 전체국익(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라면 버리고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들의 가짜 진보에 열불을 못 참아 쓴 글들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한때 자신도 어깨를 나란히했던 ‘진보주의자’ ‘민주투사’들에 대한 이 도저한 분노는 어디서 비롯됐으며, 얼마나 합당한 것일까. 김지하, 유홍준, 고은, 박원순, 김근태 등에 대한 실명비판은 실로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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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친 파고가 오랜 세월 인간문명의 터전이었던 대다수 국가의 농업기반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지난해 6월 정부의 쌀개방 정책에 항의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 최아무개(49)씨의 양파밭에서 집회를 연 뒤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었다. 논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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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국 차원 부의 증대는 타국 피폐화 요컨대 조금 물질적 생활수준을 지금보다 낮추더라도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결국 “쌀과 농업”에 기초한 “자조, 자족, 자주, 자치” 즉 “지역 코뮌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전지구를 석권하고 있는 유목주의가 이를 근본적으로 그르치고 있으며, 한때 진보를 자처했던 민주투사들이 정치권력을 쥐게 된 이 땅은 권력에 취했는지 무비판적으로 유목주의를 떠받들면서 모든 정책을 거기에 맞추고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분개하는 이유다. 국가의 역할증대나 증세 방침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 시각은 “세금과 보험금을 많이 걷어 큰 복지국가 만들겠다는 사람들보다는 시장과 국가 중에서 국가 하나라도 줄이고 시장만 키워서 거기에 복지를 맡기자는 쪽이 오히려 진보적이 아닐까”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런 시각은 얼핏 조지 부시 정권이 모델로 삼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네오콘)적 ‘작은 정부’나 감세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의 영국 보수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저자가 인류 공적으로 지목한 신자유주의와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기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사실은 좀 당혹스럽게 한다. 미 공화당 감세 논리야말로 강자를 위한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라는 비판이 미국 내부에서도 거센 터에. 게다가 투자 등 기업활동과 소비 촉진을 겨냥한 감세정책은 결국 지구자원 고갈을 가속화하고 생태계를 절단내는 원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은가. 국가 해체를 지향할 만큼 ‘급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저자가 그리는 지속 가능한 인류의 이상향은 서구 유목주의에 멸망당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호주, 아프리카의 파괴당하기 전 농경문화를 닮아 있다. 물질생활 발전이 행복의 증대와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 일국 차원의 부의 증대는 타국의 피폐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힘과 물질의 증대가 곧 진보라는 개념은 허구라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찬반을 떠나, 한계에 다다른 듯 보이는 서구문명의 대안으로 충분히 고민해볼만한 화두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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