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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3 18:34 수정 : 2006.02.24 19:03

정재승/카이스트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

정재승의 책으로 읽는 과학/ <백만 개의 작은 조각들>

요즘 미국 출판계의 화제는 단연 제임스 프레이의 회고록 <백만 개의 작은 조각들>(A Million Little Pieces, 2003)이다. 이 책은 저자 프레이가 술과 마약에 중독돼 육체가 병들어가고 설상가상으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여자친구가 자살까지 하면서 황폐한 삶을 살지만, 재활센터에서 힘겹게 재기에 성공하게 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린 자서전이다. 이 책은 오프라 윈프리쇼가 추천하는 북클럽 도서에 선정되면서 순식간에 2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러나 화제는 지금부터다. 타인의 거짓말을 파헤치는 웹사이트 ‘더 스모킹건 닷컴’이 1월 초 저자 프레이가 이 책에서 자신의 체포 기록과 재활센터에서의 생활, 여자친구의 죽음을 과장했을 뿐 아니라 거짓말까지 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는 책에서 87일간 감옥에 갇혀있었다고 기술했지만, 사실 그가 감옥에서 보낸 기간은 몇 시간에 불과했다. 감옥에서 마취 없이 충치 치료를 받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실은 없었으며, 심지어 책의 중심인물인 여자친구 릴리의 자살 방법도 훨씬 극적으로 각색되었다. 독자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오프라 윈프리가 이 책의 거짓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을 빗대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며 프레이를 옹호하다가 언론의 질타를 받고 정중히 사과하게 되면서 더 큰 화제가 되었다. 프레이 역시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자서전과 논픽션 에세이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자서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실을 바탕으로 써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남들에게 널리 읽히기 위해선 극적인 구성과 드라마적 요소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서전이나 넌픽션 에세이의 저자들은 진실과 드라마 사이에서 위험한 외줄타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프레이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없던 내용을 창작해내는 일은 흔치 않지만, 감정을 과장하거나 극적인 요소를 첨가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과학에세이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은 고전이 된 제임스 왓슨의 ‘이중나선’을 읽고, 그와 함께 디엔에이 구조를 연구했던 프란시스 크릭은 ‘이 책이 이중나선의 발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고 왓슨의 역할을 과장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리처드 파인만과 머레이 겔만이 각자 자신의 자서전에서 같은 사건을 나름의 기억으로 재구성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기술한 사건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진실은 아마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텐데 말이다.

오늘 뉴욕 116번가 콜롬비아대학 구내 서점에서 제임스 프레이의 책을 사서, 눈에 잘 보이는 책상 한 귀퉁이에 꽂아두었다. 극적인 구성을 위해 내게도 꿈틀거릴지 모르는 ‘과장과 왜곡의 글쓰기’ 욕망을 잠재우는데 이 책은 좋은 반면교사가 돼 줄 것이다. 우리가 과연 진실이란 것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진실을 향하고자 하는 열정’만큼은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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