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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3 18:52 수정 : 2006.02.24 19:06

정현섭/ING생명 백두지점 부지점장

바쁜 기자생활 30년 접고
비단길 걸어서 1만2천㎞
‘오늘’에 집중하는 미덕
‘느림’에 대한 사유 뚝뚝

나는 이렇게 읽었다/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나는 걷는다1,2,3>

“도착하기만을 원한다면 달려가면 된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싶을 때는 걸어서 가야 한다.” 일찍이 루소는 <에밀>에서 느림의 미학을 풀어놓았지만 느림이 새삼 주목받게 된 것은 지구촌이 하루 생활권이 되어버린 빠름의 시대에 이르러서다.

반드시 먼 훗날의 꿈을 위해서가 아닐지라도, 5년 후 목표를 위해, 올해 이루고 싶은 다짐을 위해, 이번 달 달성해야 하는 실적을 위해, 어떠한 ‘존재’가 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지나간 과거 때문에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잠시 시계 태엽을 느슨히 하지 않으면 느림의 사유가 뚝뚝 묻어나는 이 사람을 놓칠지도 모르겠다. 환갑을 넘긴 이 ‘젊은이’를.

서점에 들렀다가 무심코 집어 든 이 책에 홀리듯 빠져 들게 했던 것은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걸었던 길을 표시한 한 장의 지도였다. 그는 30여 년간의 숨가쁜 기자생활을 접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실크로드 1만2천킬로를 장장 4년에 걸쳐 걷고 또 걸으며 생생한 삶을 길어왔다. 여생을 편히 보낼 수도 있을 노구를 흙먼지 매캐한 그곳으로 떠민 힘은 무엇이었을까.

“홀로 외로이 걷는 여행은 자기 자신을 직면하게 만들고, 육체의 제약에서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락하게 사고하던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 이는 또한 혼자 걷는 것을 선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여정에서 친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1권 189쪽)

그가 굳이 걸어서 실크로드를 따라 가려는 것은 테헤란, 사마르칸트, 투르판, 시안 등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 길 위에 사는 이들의 삶을 느끼고, 하루하루 순간순간 자신의 삶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이리라.

오지를 하루 평균 30km씩 걷기 위해서는 ‘오늘’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발에 난 물집을 치료해야 하고, 지도에 표시된 마을이 정확한지 물어야 하고, 탈수되지 않게 물을 마셔야 하고, 사람들과 섞여야 한다. 그런 하나하나의 행동을 나중을 위해 미룰 수가 없다. 찌는 듯한 더위를 감당하고, 내리는 비를 맞고, 쫓아 오는 양치기 개들을 피하고, 가방을 빼앗으려는 도둑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가 수개월 동안 걸어 간 투르판에서 시안에 이르는 길을 1996년 6월 나는 기차를 타고 갔다. 내 기억에 남는 실크로드는 너무나 예쁘던 유채꽃밭, 황허 끄트머리에 걸려 있던 만리장성 유적, 천산의 천지, 투르판의 포도길, 돈황의 석굴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서장 자치구의 시장 한 구석에 뒹굴던 염소 머리…. 그래,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러나 단지 스쳐 지났을 뿐이기에 사람들은 없다. 그곳의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은 없는 것이다.

그가 걷기를 시작한 터키에서도 그는 유럽 여행자를 만나지만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또는 자동차를 타고 달려간다. 더듬더듬 현지 말로 잠자리를 구하고, 친교를 맺고, 다른 문화를 접하는 대신 멀어져 가는 풍경을 뒤로 하며 스쳐 지나가기만 한다. ‘우리는 지난 일을 기억하거나 앞날을 향해 가느라 바빠 현재에 거의 집중하지 못한다’는 심리학자 스키너의 말을 곱씹게 한다.

접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깊이는 운송 수단의 빠르기에 반비례한다고 한다. 빨리 지나칠수록 오늘을 사는 그들을 만날 수 없다. 그저 어제와 내일을 사는 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풍경만을 보고 있는가, 오늘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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