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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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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삶의 모든 것, 고요 속에 바스러지고 있다
허나 후회는 말라
부서짐은 앞서 무언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겠는가?
꽃이 지며 자기 생을 완성하듯이
황동규(68)씨의 열세 번째 시집 <꽃의 고요>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가만히 둘러보면 인간은 기실/간신히 깨지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시방 같은 봄 저녁/황혼이 어둠에 막 몸 내주기 전 어느 일순/홀린 듯 물기 맺힌 눈 아니고는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어떤 것이다.”(<슈베르트를 깨뜨리다> 부분)
1938년생인 황씨는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그의 나이 어느새 고희를 코앞에 두게 되었고, 문단 경력도 어언 반세기를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인용된 시는 그만한 연륜과 경험을 거친 이에게서 나올 법한 통찰과 감회를 보여준다. 인간과 생의 바스러질 듯 아슬아슬한 존립 근거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눈에 맺힌 물기로써 상징되는 회한과 안타까운 미련….
시집 전체를 통해 삶과 죽음이라는 화두는 줄곧 시인을 붙잡고 놓아 주질 않는데, 그 일생일대의 화두를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다소 분열적인 것으로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주의적 노력이 한편에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생의 막바지일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삶의 감각을 최대한 향유하려는 쾌락주의적 지향이 만져진다. 전자를 이성의 작동으로, 후자를 감성의 발현으로 각각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간 참 많이도 느슨해진 금,/마음먹으면 넌지시 들치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누군가 속삭인다,/비자가 필요 없다고./다른 누군가 속삭인다,/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또 누군가 속삭인다,/애초에 금 같은 것은 없었다고.”(<마지막 지평선> 부분)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는 밤/젖은 나무에 기대어 남자에게 따뜻한 젖 먹이고 있던 여자…/찬 술 마지막 방울까지 들이켰지,/앞으로 모쪼록 피 따끈히 도는 삶을 살라 빌며.”(<훼방동이!> 부분)
일관된 화두는 ‘삶과 죽음’
황씨의 시집에서는 “몇 번이고 되물어 관계들이 헐거워지면/손 털고 우주 뒤편으로 갈 것”(<손 털기 전>)이라는 허허로운 다짐과 “저린, 낯선, 눈부신…”(<사라지는 마을>) 혹은 “눈부시고 쓰리고 아리고…”(<막비>), 심지어는 “사로잡힘, 숨막힘, 캄캄함”(<그럼 어때!>)과 같은 날선 생의 감각에 대한 집착이 공존하고 있다. 평화롭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공존은 차라리 모순과 길항 속의 공존, 또는 변증법적 공존이라 부를 만한 성질의 것이리라. 삶과 죽음이 반드시 화해 불능의 대립 관계에 놓일 일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자연스러운 연장이자 귀결이고, 삶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나중 웃는 자가 진짜 웃는 자’라는 서양 속담을 참조한다면, 결국 사태는 죽음 쪽의 승리라는 말씀? 이 역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내세에 ‘올인’하면서 현세를 극단적으로 부정하거나 멸시하는 종교적 경향이 없지 않겠지만, 시인이 생각하는 바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시집 도처에서 발견되는 생에 대한 적극적인 찬미의 노래들을 보라. “십오 년 전인가 꿈이 채 어슬어슬해지기 전/바다에서 업혀온 돌/속에 숨어 산 두 사람의 긴 긴 껴안음,/얼마 전 거실에서 컴퓨터 책상으로 옮길 때 비로소 들킨/마주 댄 살들이 서로 엉겨 붙은/껴안음보다 더 화끈한 껴안음,/그만 절하고 싶었다.”(<절하고 싶었다> 부분) 죽음에 대한 수락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생의 감각에 대한 찬미가 공존할 수 있는 비결을 <정선 화암에서>가 보여준다. “네 삶의 모든 것, 고요 속의 바스락처럼/바스러지고 있다./자, 들리지?/허나 후회는 말라./부서짐은 앞서 무언가 만들었다는 게 아니겠는가?//…/만든 것은 결국 안 만든 것으로 완성된다/꽃이 지며 자기 생을 완성하듯이.”(<정선 화암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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