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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3 21:15 수정 : 2006.02.24 19:08

최성각/소설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알지 못하는 분께 받은 두번째 소포
생활용품 만드는 데 쓰라는 망치·줄자·장갑…
그리고 편지봉투 속에 놓인 접시꽃씨 한 봉지
가망없는 세상살이지만 올봄엔 할일이 생겼다

녹색 에세이/달려라 냇물아

최근 삼성은 그들이 한 일로 인해 법정에 서는 대신 전에 내놓겠다는 돈까지 포함된 8천억원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약속으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당혹에 빠뜨렸다. 삼성에 곱게 보이면 사소한 이익을 얻을 게 분명한 경박한 논객들은 잽싸게 “시민사회는 단지 큰 고기(Big Fish)라는 이유로 이제 그만 물어라. 국익에 보탬이 안 된다”고 환호하며 사상 초유의 헌납(?) 결단에 대해 같이 기뻐할 때라고 아양을 떨어댔다. 정작 삼성으로 하여금 그나마 그런 결정을 하게 만든 주역인 참여연대는 당장 이사갈 곳도 불확실하고 이사비용도 부족하건만, 그 돈의 의미에 대한 판단유보의 태도로써 돈의 용처는 물론 ‘삼성을 지켜보는 모임’에 들어오라는 유혹에 단호하게 손사래를 쳤다. 미국은 약속과는 달리 천문학적인 액수의 미군기지 오염복구비를 우리에게 덤터기 씌우고 있고, 바로 그런 자들이기 때문에 평택의 대추리에서는 멀쩡한 사람들 내쫓고 거기 들어설 미군기지가 전쟁억제 수단이기는커녕 전쟁을 도발할 것이라는 이유로 미군기지 반대를 내건 대보름 집회를 열었다. 시위가 평화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전투경찰들이 방패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는 후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그 시위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봄이 오면 대추리 땅에 다시 물을 대고 모내기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늙어 보이는 사진 속의 문정현 신부는 그 분이 설사 웃고 있더라도 바라보는 이를 눈물나게 만든다. 한 종교인으로서, 그보다 한 인간으로서 주어진 시대에 대한 정직한 대응으로 일관한 그 분의 삶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봄이 오고 있건만, 어디에도 반가운 소식이 없다. ‘보이는 건 모두 돌아앉았는가.’

그러고 있는데, 퇴골 연구소 비좁은 비포장의 질퍽질퍽한 ‘민들레길’에 택배 용달이 천천히 들어섰다. 받아보니, 제법 무겁고 큰 박스였다. ‘산야초’라는 분이 보내온 물건들이었다. 초록색 테이프로 촘촘하게 둘러싼 박스를 여는 순간, 입이 벌어진다.

망치가 먼저 손에 집혀졌다. 그것도 쇠망치와 고무망치 두 종류다. 그 외에도 별의별 물건이 다 쏟아져 나왔다. 2m짜리 줄자, 수평자, 벤찌, 전깃줄, 시꺼먼 전선 테이프, 비닐에 든 길고 짧은 피스 뭉치들, 너비 3㎝의 고무다발, 쁘라야, 아가리 크기가 다양한 스패너 4개, 조이면 풀리지 않는 플라스틱 조이개 한 뭉치, 커다란 온도계, 녹슨 직각자, 콘센트가 달린 플러그, 일반 테이프, 손바닥에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두툼한 목장갑 다섯 켤레와 보통 목장갑 두 켤레, 사포, 목공칼 한 자루, …아, 그리고 길이 1m가 채 안 되는 흰색 고무호스도 담겨 있었다.

장갑과 전선테이프를 제외하곤 모두 누군가 쓰던 것들이었다. 스패너는 오래 쓰던 것이라 이빨이 닳은 흔적이 역력했고, 콘센트도 때가 묻어 있는 걸 보니 한참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게 벌써 두 번째였다. 지난해에도 산야초님은 언젠가 자신이 퇴직하고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면 쓰려고 구해 둔 것들을 “재활용의 달인 금연못각님에게 보낸다”고 이번처럼 택배로 문득 보내주셨다. 그때는 방앗간이나 기름집에서 쓰는 플라스틱 끈다발 두 뭉치였다. 얼마나 촘촘히 감겨 있었던지 평생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것은 개집 대문을 만들 때, 접어서 경첩으로 사용한 이래 아직도 창고에 소중하게 남아 있다. ‘금연못각’은 도저히 담배를 끊지 못하겠다고 스스로 굴복해 붙인 나의 인터넷 아이디다. 산야초님이 이 형편없는 사람, 못각이를 재활용의 달인이라 과찬한 것은 분에 넘치는 말씀, 그저 이것저것 버려진 물건들 주워 뚝딱뚝딱, 볼품없는 생활용품들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불러주셨을 뿐이다.


산야초님은 누구신가. 나는 그분이 누구인지 아직 만나뵙지 못해 모른다. 벌써 이태째 필자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 사이트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분으로서, 연세는 50대 후반. 구로구 고척동의 한 중소기업에서 정년퇴직까지 근무한 뒤, 지금은 다른 회사에서 월급사장인가 중역으로 한 2년쯤 더 근무하게 되었다는 것 정도가 그분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다시 맡게 된 이번 일만 마치면 곧바로 강원도 동해안의 고향으로 치달려가 농사도 짓고, 이것저것 목공도 하고, 공구도 만지면서 살겠다는 게 그분의 꿈이다. 그런데 내가 먼저 그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아낌없이 그 동안 슬금슬금 꼬불쳐둔 것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별 그지같은 오만잡동사니들이지만 장물은 아니니까 마음놓고 쓰십시오. 회사 업종전환으로 전에 사용하던 것들이 창고구석에 ‘불용(不用)’으로 굴러다니던 것들인데, 봄이 왔으니 어디엔가 쓸 만한 데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시골생활을 하면 요긴하게 쓸 물건들이지만 아직 그런 꿈이 이뤄지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입니다.”

물건들과 함께 동봉한 편지에 적힌 내용이었다.

이런 사태는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물건들이 서로 부딪쳐 훼손될까봐 겹겹이 싼 포장지들을 풀어헤쳐 바닥에 죽 늘어놓은 뒤,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그것들을 마치 과외의 전리품을 노획한 하급장교의 득의에 찬 자세로 내려다보면서 나는 오장육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깊은 감동에 젖었다. 하지만 그 절대절요(絶對切要)한 잡동사니 물건들보다 나를 더 격심하게 감동시킨 것은 그분이 편지봉투 속에 넣은 꽃씨 한 봉지였다. 작은 단추 만한 마른 꽃씨는 마치 바위에 붙어 있던 따개비를 열어놓은 것 같았다. ‘적색 겹접시꽃 2005년 7월17일’이라 적힌 메모는 꽃씨를 채취한 날짜로 보였다.

“접시꽃씨는 제가 시 외곽을 지나다 길가에 피어 있는 처음 보는 겹접시꽃이 하도 보기 좋아 채취한 것입니다. 그때가 장마철이 끝날 때라 씨앗이 영글었는지, 싹이 틀지는 모르겠지만 연구소 길목에 한번 뿌려보도록 하세요.”

세상 돌아가는 판세는 언제나 그렇듯이 완고하고, 거칠고, 가망 없어 보이기 일쑤다. 그렇지만 봄이 오면 나는 할 일이 있다. 산야초님이 보내주신 접시꽃을 개울가 민들레길에 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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